지리산 : 어머니 같은, 그리하여 사람도 품은
남해군의 산 : 수려한 그 풍경만큼 구구절절 사연 품은

인문학으로 풀어낸 경남의 산 이야기

향토기업 ㈜무학과 경남도민일보가 공동 기획한 '경남의 산' 시리즈가 2월호부터 연재됩니다.

지리산을 시작으로 18개 시·군마다 한 회씩, 모두 19편 중 2편씩 묶어 피플파워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번 기획은 단순히 등산의 대상으로서 산이 아닌, 인문학적 접근에서 산과 사람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를 위해 산과 사람의 관계, 그렇게 형성된 문화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최원석 경상대 교수께 취재 도움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최 교수가 제시한 '진산(鎭山)' 개념을 통해 우리 지역을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지리산

'민족의 영산' 지리산(智異山)은 사람을 품은 산이다. 성찰과 은둔 속에 이상향을 꿈꾸는 곳이기도 하다. 변혁과 저항의 거점이었다. 높고 낮음, 크고 작음으로 구분하는 지리적 특성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남 대표 산'이다.

'하늘을 오른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중산리~칼바위~법계사~천왕봉에 오르면 장쾌한 지리산 일백 리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거침없고 웅장한 그 모습에 절로 탄성을 지르게 된다. '한국인의 기상(氣像) 여기서 발원(發源)되다'는 천왕봉 정상 표지석 글귀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너른 형세는 어머니 품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지리산을 어머니 산이라 부른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처럼 지리산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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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시천면 덕천강변에서 본 천왕봉.동요 가사처럼 구름모자를 썼다. /유은상 기자

산에 기대어 사는 그곳의 사람에게 지리산은 풍요의 땅이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굶지 않는다. 사람이 모이고 인물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1500m가 넘는 고산 준봉을 포함해 100여 개에 이르는 봉우리만큼 환난의 역사와 민초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은 골짜기도 그만큼 있다. 혹독한 핍박을 피해 골짜기에 숨어든 민초는 움막을 짓고 숯을 구우면서 질긴 목숨을 연명했다. 지리산이 보듬어 주지 않았다면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립공원 1호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지리산은 생태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도시민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공간이다.

'지리산 시인'으로 불리는 이원규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제목의 시(詩)에서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라고 지리산을 표현했다. 변화무쌍한 대자연 지리산이 사람을 보듬고 안식과 위안을 주는 큰 그릇임을 강조한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너무나 큰 지리산, 그 속으로 들어간다.

깊고도 부드러운 토산에서 핀 꽃 '국립공원 1호'

대한민국 '국립공원 1호' 지리산.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벌써 지정 50주년을 앞두고 있다.

1호라는 의미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뛰어난 자연·환경·경관·문화적 가치를 지녔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백두산의 정기와 맥이 이어진 민족 영산이며 영·호남 사람의 터전이자 생명의 산으로 불린다.

산세는 유순하나 면적은 471.7㎢에 이르며 3개 도(경남·전남·전북), 5개 시·군(산청군·함양군·하동군·구례군·남원시)에 걸쳐 있다. 그중 경남이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경남 최고의 산이라 해도 이견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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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천왕봉./유은상 기자

해발 1915m의 최고봉인 천왕봉 서쪽으로 칠선봉, 덕평봉, 명선봉, 토끼봉, 반야봉, 노고단과 동쪽으로 중봉, 하봉, 싸리봉으로 이어진다. 1500m가 넘는 봉우리 10여 개, 1000m 이상 봉우리가 20여 개에 이르는 대한민국 최대의 산악군이다.

산에서 발원한 경호강과 엄천강,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리산이 펼쳐 놓은 넓은 치맛자락에 계곡을 만들고 아름다운 수를 새겼다. 계곡은 피아골, 뱀사골, 칠선계곡, 한신계곡, 의신계곡, 화엄사계곡 등 20여 개에 이른다. 하천과 계곡은 지역을 가르고 동시에 교통로로 이용되면서 다시 지역을 연결한다.

지리산(智異山)은 산세에 맞게 많은 이름을 소유하고 있다.

지리산의 한자 뜻을 그대로 풀면 '지혜롭고 기이한 산'이라는 의미다. 국립공원 누리집에서는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이라 해석한다.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두류산이다. 두류(頭流)는 백두산 맥이 흘러내려 이뤄진 산으로 가장 많이 해석된다. 이 밖에도 중국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발해만 동쪽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 기록돼 불렸다.

토질 비옥하고 수량 풍부해 산림·식물 풍성하게 자라

좀 더 과학적으로 지리산을 들여다보자. 지리산은 선캄브리아기 중기 넓은 바다였지만 세 번 이상의 지각 변동으로 산이 되었다. 편마암과 편암 위주로 이뤄진 지질은 오랜 기간 침식과 퇴적을 거쳐 토산을 형성했다.

토산은 석산과 달리 산세가 부드러우며 토심이 깊어 산림, 식물 등을 풍요하게 길러낸다. 사람에게는 농사를 가능하게 해 터전을 제공했고, 깃들어 사는 다른 생명에도 풍부한 먹거리를 나눠주는 어머니 품 같은 너그러움과 자애로움을 지녔다.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수량 덕에 지리산은 1만 5500여 종에 이르는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 보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반달곰과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2급인 히어리, 삵, 하늘다람쥐, 노랑붓꽃 등 34종의 멸종위기종이 서식한다.

동물·사람에게도 '삶의 터전' 수많은 문화유적 자리잡아

특히 인간은 환경 훼손의 큰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많은 문화유적을 남겨 지리산 가치를 더 높이며 작지만 그 은혜에 보답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47호)를 포함해 국보 7점, 보물 31점, 사적 1곳, 명승 2곳, 천연기념물 9점 등 모두 79점의 지정문화재가 지리산에 존재한다.

지리산에 사는 이들은 삶 그 자체가 혜택이며 행복이라 말한다. 이곳에 살지 않아도 지리산은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올라봐야 할 산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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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사를 지나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 핀 상고대.상고대는 수증기가 나무 등 차가운 물체에 얼어붙으면서 눈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유은상 기자

중산리~법계사~천왕봉으로 오르는 길, 백무동 한신계곡~하동바위~장터목~천왕봉에 이르는 길, 신흥에서 대성동~세석~천왕봉으로 이어지는 길이 대표적인 등산코스다. 천왕봉 등산 이상의 것을 느끼려는 이들은 노고단~천왕봉 주능선에 이르는 종주를 택한다.

지리산은 계절, 시간 변화에 따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노고단 운해, 피아골 단풍, 반야낙조, 섬진청류, 벽소명월, 불일폭포, 세석철쭉, 연하선경, 천왕일출, 신비로운 칠선계곡이 '지리산 10경'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둘레길이 잘 조성돼 인기를 끌고 있다. 지리산에 오르지 못한다면 가끔 찾아가 지리산 넉넉한 품에 안기는 것도 또 다른 혜택이며 작은 행복일 것이다.

산청군 삼장면 새재마을을 가다

산청군 삼장면 새재마을은 아마도 지리산 경남권역에서 가장 높은 자연마을일 것이다. 대원사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있는 마을이다. 지도를 보니 마을 꼭대기에 있는 집이 해발 730m다. 20가구 채 되지 않는 이곳에는 거의 평생을 지리산에 기대 사는 이들이 많이 산다.

민박을 치는 송우점(84) 할머니가 생초면에서 새재 골짜기에 들어온 게 한국전쟁 직전의 일이다. 당시는 마을이랄 것도 없이 골짜기마다 숯을 굽는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다. 지금 새재마을이 있는 골짜기에는 할머니 식구가 유일했다. 그러다 하나둘 사람들이 깃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숯 굽는 일을 했다. 때로 약초를 캐서 부부가 함께 덕산까지 걸어가서 팔았다. 새벽에 출발하면 오전 11시나 돼야 시장에 도착했다. 약초를 팔고 보리쌀 몇 되를 사서 다시 돌아오면 한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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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경남권역에서 가장 높은 자연마을인 새재마을.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남아 있다. /유은상 기자

"호랭이(호랑이)가 동네 개처럼 흔하던 때라, 아이고 그때는 목숨 떼 놓고 살았어. 호랭이가 잡아 무면 고마 잡아 멕히는 기고. 이 골짝에도 호랭이가 목숨을 너이나(4명이나) 데꼬갔어. 지금은 호랑이가 한 마리도 없어. 곰도 막 버글버글하드마는 오드로(어디로) 다 갔는지 없어."

숯을 굽고 밭을 일궈 농사도 짓고 약초도 캐서 팔면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다. 하지만, 나이 일흔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는 노름이 심했다. 그렇게 소 3마리를 잃었다. 그래도 지리산에 기대 억척같이 살았다.

"말도 못하지, 참, 말도 못해. 지금은 산나물 쳐다보기도 싫어. 그걸로 배를 채아난께. 그래가 먹고살았다."

사과 농사를 짓는 김복석(67) 씨는 한국전쟁 직후에 아버지를 따라 새재마을에 들어왔다.

"처음 들어올 때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쟁 이후에 못 먹고 살 때, 그래도 여기는 하루 벌이가 되니까. 이 골짝만 해도 100집 넘었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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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 삼장면 새재마을 아낙. 지리산에서 뜯은 나물을 계곡 물에 씻고 있다. /유은상 기자

여전히 숯을 굽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이다. 더러 큰 나무를 베어 팔기도 했다. 농사를 짓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나무를 하도 베어내서 입산 금지령이 떨어졌다. 많은 이들이 먹고살 길을 찾아 마을을 떠났다. 김 씨도 잠시 지리산을 떠나 공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지리산은 자기만 부지런하면 절대 안 굶어요. 뭘 해도 할 게 있습니다. 약초를 캐도 되고 열매를 따도 되고. 지리산은 어머니 같은 산이지요. 공기도 좋고, 물도 맑고, 그러니 이 골짝 안 삽니까. 밖에 나갔다가 이 골짝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져요."

지리산 깊은 골짝마다 이상향 찾는 삶 뿌리 내리다

지리산은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생활 문화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뻗어 나간 능선만큼이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지리산에는 다양한 이미지가 투사되어 있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어머니 산'이다. 지리산 산신인 성모천왕(聖母天王) 이야기는 고려 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등장한다. 성모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리산을 생각하면 왜 어머니 산인지 분명해진다. 지리산은 풍성한 흙산이라 땅이 비옥하고 계곡마다 물이 풍부하다. 지리산이 한국 산지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이유다.

같은 여성 산신 중에서도 어머니와 할머니를 구분할 수 있다. 젖이 나오느냐 즉, 물이 풍부하냐가 관건이다. 한라산 산신은 설문대할망으로 할머니 이미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생명이나 존재의 근거가 되는 모성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한라산은 화산 폭발로 형성된 탓에 지리산만큼 물이 풍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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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봉우리 중에도 할머니 이미지를 지닌 게 있다. 노고단이다. 노고(老姑)의 옛 이름은 노구(老軀)라고 추정하는데, 옛날 노고단에 할머니 신을 모신 노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노고단이 있는 지리산 서쪽은 화강암 지역으로 천왕봉이 있는 동쪽보다 상대적으로 땅이 척박하다.

조선 선비 성찰의 길

조선시대 선비들은 유달리 유산기(遊山記)를 많이 남겼다. 일종의 산행 기행문이다. 고려 중엽부터 드문드문 기록이 있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선비들의 유람 등산이 시작되었다. 지리산 유산기를 남긴 선비는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의 글을 통해 당시 지리산의 기후, 지형, 생태나 주민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이들 선비는 지리산에서 경치 구경이나 하며 노닌 게 아니다. 산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봤다. 지리산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인지지락(仁智之樂)'이란 표현이 있다. '산을 보고 물을 보면서 그 본원을 생각하고, 다시 자신에게 돌이켜 본성의 인(仁)과 지(智)를 생각'하는 조선 선비의 산행 자세를 말한 것이다. 그야말로 도덕적, 인문학적으로 지리산을 바라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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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 아래 등산길. / 유은상 기자

지리산 청학동은 한국의 이상향을 대표한다. 고려 후기 문신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에 옛 노인이 말했다는 청학동 이야기가 나온다. 겨우 사람이 통과하는 좁은 길을 지나면 갑자기 농사짓기 좋은 넓은 땅이 나오며, 속세를 등진 사람들이 살던 곳이란 내용이다. 이인로의 글 이후로 많은 이들이 청학동을 찾으려 애를 썼다. 현재로서는 쌍계사 뒤편 불일폭포 부근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인 화개·쌍계계곡 언저리의 호리병 속 같은 불일평전 말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이상향이 지리산에 자리 잡은 것은 지리산의 형세 때문일 테다. 지리산에는 옛날부터 많은 이들이 숨어 살았다. 신라 말 최치원이나, 고려 말의 기인 한유한 같은 이들이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는 이들에게 숨을 곳을 제공했다. 주변분지는 적정 규모의 공동체가 자급자족할 농사를 지을 만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리산에는 꽤 많은 '청학동'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청학동은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백성들 사이에 더욱 회자했다. 힘든 세상을 떠나 평화롭게 살 유토피아로서 말이다.

변혁과 저항의 거점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불복산(不伏山), 반역산(反逆山)이다. 역사 속에서 지리산은 많은 저항세력의 거점 노릇을 했다. 17세기 이후 조선 정국이 혼란하고, 무신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실패하면서 많은 반군이 지리산으로 몸을 피했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은 전쟁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피난처로 지리산 남쪽 자락 마을들을 언급했다. 조선 말기 일어난 진주 농민항쟁이나 농민항쟁은 지리산 자락인 덕산이 거점이었다.

현대사에서 지리산은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후 주도자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 정규부대가 대거 빨치산에 합류한다. 당시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로서 지리산은 적구산(赤拘山)이란 또 하나의 별명을 얻는다.

높고 강직한 지리산에 실천적 학문 '둥지' 일군 남명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산천재는 조선 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이 61세부터 살며 제자를 가르친 곳이다. 남명은 평생 벼슬이라고는 해 본 일이 없다. 그런 그가 조선 유학자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큰 발자취를 남긴 것은 오로지 철저한 자기반성과 절제라는 그의 학문 태도 덕분이다.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퇴계 이황이 경상좌도 사림의 우두머리였다면, 남명은 경상우도의 우두머리였다. 산천재에서 남명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부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은 의를 실천하는 조선 선비정신의 발현이며 남명 학풍의 실천적인 도덕성을 상징한다.

지리산은 이런 남명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도덕적 목표였다. 벼슬을 하던 부친을 따라 각지로 옮겨 다니던 그는 30세가 되자 처가가 있는 김해에 정착한다. 숙부가 기묘사화에 목숨을 잃고 부친이 관직을 잃자, 오직 권력에만 눈이 먼 자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본 남명은 학문에만 뜻을 두기로 하고 자신만의 공부를 시작한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던 그는 지리산을 만나면서 더욱 깊고 높아졌다. 지리산에 매혹된 그는 장년 시절 10번 이상 지리산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환갑이 지나자 아예 천왕봉이 잘 보이는 자리에 터를 잡고 매일 지리산을 거울삼아 사색하고 성찰한다. 그리하여 산천재는 남명의 사상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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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 산천재. / 유은상 기자

하늘이 요동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지리산을 닮고자 했던 그의 기상이 어느 만큼이나 높고 강직했는지, 산천재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지리산, 지역 대표하는 '진산'··· 군사·경제·신앙적 가치

경상대 명산문화연구센터장인 최원석 교수는 인문학적으로 산을 연구하는 학자다. 서울대 지리학과에서 풍수를 전공한 후 지금까지 산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는 특히 산과 사람이 오랫동안 관계하며 형성한 문화에 주목했다.

때마침 최 교수는 전국 진산을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진산은 조선시대 군·현마다 공식적으로 지정되어 있던 대표 산이었다. 한자로는 '鎭山'인데 고을을 지키는 산이라는 뜻이다.

군사적으로는 방어 요새였고, 경제적으로는 생활 터전이었으며, 신앙적으로도 섬김의 대상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 각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 꼭 이 진산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경남의 산' 취재진은 최 교수의 자문을 바탕으로 진산의 과거, 현재를 살펴볼 계획이다.

남해군의 산

'경남의 산' 두 번째 여정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하늘을 품은 산이 있는 남해군이다.

남해는 우리나라에서 제주, 거제, 진도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섬(창선을 제외하면 다섯 번째)으로 산지 면적이 섬 전체 68%에 이르는 산지형 섬이다. 해안을 따라 가파르게 솟은 산은 남해 사람의 척박한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비탈진 경사지에 촘촘히 들어선 계단식 논밭은 땅 한 뙈기가 아쉬운 남해 사람의 끈질긴 생명력의 산물이다. 이제 그 고단함이 도시민에게 휴식과 힐링을 주는 '보물섬'으로 거듭나고 있다.

느리게 걸으면서 이야기가 있는 남해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바래길이 해안을 조망하는 도보 여행길이라면, 50여㎞에 이르는 남해 지맥 종주 코스는 섬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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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금산 화엄봉에서 바라본 일출. 해가 바다 위로 솟아오를 때 금산은 온통 황금비단을 걸친다. /유은상 기자

'남해 5좌'로 불리는 망운산, 금산, 대방산, 설흘산, 호구산 가운데 전국 3대 기도처의 하나이자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이 있는 금산을 명산(名山)으로 칭하지만 남해 사람은 섬에서 가장 높은 망운산을 진산(鎭山)으로 부른다.

금산은 빼어난 경치와 함께 산 곳곳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에 얽힌 사연들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남해 산행의 백미는 역시 금산 일출이다. 정유년 새해 미조 앞바다에서 솟아오른 붉은 해의 기운을 카메라에 담아 독자 여러분께 전한다.

보물섬 지키는 수호산

남해안과 서해안은 해안선이 매우 들쭉날쭉한 리아스식 해안이다. 우리말로 침강해안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가라앉은 땅이란 뜻이다. 남해안의 복잡한 해안과 섬은 사실 웅장한 산맥이었다. 상상해보자. 일본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던 시절, 한반도 남단에 연이어 솟은 거대한 산봉우리를. 그중에서도 으뜸은 지금 남해군이라 불리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현재 남해군 최고봉은 망운산(786m)이다. 다음으로 금산(701m)이 높다. 이들 산만 해도 이웃한 거제시나 고성군, 전남 여수시 등 주변 지역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게 높다.

옛 지도로 본 남해 산

조선시대 군현을 자세히 표시한 <1872년 지방도>를 보면 당시 남해현은 지금의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섬이었다. 창선면은 진주목에 속했다. 남해현의 진산(鎭山)은 망운산이었다. 망운산은 오래전부터 남해를 수호하는 산이었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가장 먼저 망운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이 망운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고 창선도를 바라보는 곳에 고을의 중심인 '읍치(邑治)' 가 있다. 지금의 남해읍 자리다.

금산은 예나 지금이나 영산(靈山)이라 불리며 남해를 대표하는 산이었다. 옛 지도에서도 훌륭한 산세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산 이름이 금산봉대로 돼 있다. 봉대는 봉수대를 말한다. 금산뿐만 아니다. 남해현을 둘러싼 주요 산봉우리는 모두 봉대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아래 큰 고을마다 성곽이 있었다. 망운산 외에는 군사적인 중요성을 더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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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망운산 중턱에 자리 잡은 화방사. / 유은상 기자

역사적으로도 남해현은 물자가 풍족해서 왜적의 침입이 잦았다. 고려 말에는 한때 왜적에게 아예 남해 섬을 점령당하기도 했다. 고려 후기, 조선 전기의 문신 정이오(1347~1434)는 왜적에게 남해섬을 빼앗긴 지 46년 동안 재물과 세금이 나오던 땅이 모두 풀이 무성한 사슴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 남해섬을 되찾은 후에는 왜적을 막고자 계획도시처럼 남해현을 정비했다. 평산포진, 곡포보, 상주포보, 미조항진이 대표적으로 조선 수군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1700년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영남지도에는 금산을 포함해 7개 산에 선재봉산(船材封山)이라는 표시가 돼 있다. 이는 전선을 만들 나무를 조달하려고 국가에서 벌목을 금지한 지역이다.

망운산 정상과 망운사

망운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남해읍에서 관대봉을 통하지만 등산객은 보통 망운산 중턱에 있는 화방사에서 시작한다. 정상까지는 2.97㎞, 천천히 걸으면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산 자체는 무뚝뚝한 느낌이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풍경이 트이면서 남해군 전체가 눈 아래 놓인다. 발치에는 남해읍이 망운산 자락을 감싸 안고 아담하게 들어서 있다. 남쪽으로 금산, 호구산, 송등산, 설흘산, 응봉산 자락이 일렬로 늘어섰다. 서쪽으로는 여수와 그 너머 지리산 줄기가 이어진 모습이 보인다.

망운산 정상 바로 아래 남해읍 방향으로 기가 막힌 자리에 망운사가 있다. 지금도 주지로 있는 성각 스님이 지난 1989년 쓰러져 가는 망운암에 자리를 잡고 사찰을 재건했다. 망운암은 고려 후기 진각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방 이후 효봉, 경봉, 서암, 월하 같은 큰 선승이 수행하던 곳이다. 성각 스님도 지금 쌍계총림 방장 고산 스님의 법제자인 선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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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진산 망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망운사와 남해읍 전경. /유은상 기자

남해지역 문화해설사 서재심 씨는 이 망운사에서 바라본 관대봉이 아주 훌륭한 문필봉이라 평가한다. 이는 산 정상이 붓끝처럼 뾰족한 것을 이르는데, 풍수에서는 주변 지역 문인이나 학자가 배출된다고 해석한다. 실제 성각 스님은 망운암에 들어오면서 선화(禪畵)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지난 2013년 부산시로부터 무형문화재 선화 기능보유자로 지정돼 그 공력을 인정받고 있다.

남해산악회장이 추천하는 남해 지맥 종주 코스

류옥근(57·사진) 남해산악회 전 회장은 망운산, 금산, 대방산, 설흘산, 호구산 이렇게 5좌를 남해의 명산이라고 했다. 그중에서 설흘산과 바로 옆 응봉산을 오르는 코스, 납산을 포함한 호구산을 오르는 코스를 추천했다. 금산이나 망운산은 등산인에게 제법 알려졌다. 류 전 회장도 금산을 최고로 친다. 다만 복곡주차장을 통해 오르는 코스가 아닌, 두모주차장에서 부소암을 통해 오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설흘산은 등산길에서 보는 바다 전망 때문에 한 번 가면 꼭 다시 찾는 곳이라고 했다.

그는 또 용문사가 들어서 있는 호구산은 '산 맛'을 아는 이라면 반드시 올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느 산에서도 보기 어려운 웅장한 기백이 있는 산이어서다. 창선면에 있는 대방산 역시 보기엔 일반적인 산이지만 오르다 보면 그만의 맛이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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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옥근 남해산악회 전 회장. / 유은상 기자

그는 지난 2014~2015년 남해산악회 회장을 하면서 남해 지맥 종주 산행 코스를 개척했다. 남해대교에서 시작해 미조면까지 5개 구간이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와 남해로 이어진 지맥을 따른 것이다. 여기에 창선은 포함되지 않는데, 창선은 소맥산맥의 지맥이 이어진 까닭이다. 구체적인 남해 지맥 종주 코스는 다음과 같다.

1코스 : 남해대교~산성산~귀두산~금음산~대국산성~고현 농공단지(11.49㎞, 6시간)

2코스 : 고현 농공단지~현촌마을~망운산~관대봉~평현고개(11.97㎞, 6시간)

3코스 : 평현고개~괴음산~송등산~호구산~앵강고개(9.77㎞, 5시간)

4코스 : 앵강고개~581봉~순천바위~금산~내려 한려정~가마봉(13㎞, 7시간)

5코스 : 초전삼거리~망산~미조 빗바위(4㎞, 3시간)

남해군은 '지족마을~대방산~국사봉~속금산~연태산~창선·삼천포대교'로 이어지는 코스를 추가해 남해 일주 코스라 부르기도 한다.

(주의! 남해 지맥이든, 남해 일주 산행이든 이정표가 따로 있거나 하지 않기에 우선 남해산악회(055-864-6059)에 자세히 물어본 후 길을 나서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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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이라 불리는 남해

남해 사람들은 망운산을 남해 제1산으로 꼽는다. 가장 높을(786m) 뿐 아니라 섬의 구심점이자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지 사람 생각은 다르다. 망운산보다는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금산을 더 쳐준다. 망운산이 남해의 진산이라면 금산은 명산이라 하겠다.

남해는 보물섬이다. 보물섬이라는 수식어는 여러 측면에서 남해를 잘 설명해주면서 그 가치를 높여준다.

보물섬 발자취는 먼저 '서불과차' 전설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고자 삼신산을 찾아 남해 금산으로 온 서불. 그러나 그는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사냥만 하다 떠나면서 바위에 화상문자(畵像文字)를 새겼다.

금산 부소암 오르는 길에 있는 남해 상주리 석각은 경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전설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남해 금산은 서불이 불로장생 명약을 찾고자 왔던 보물섬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 해석의 억지스러움을 떨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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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금산 보리암과 해수관음상. / 유은상 기자

그럼 남해는 왜 보물섬일까.

예로부터 남해는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고, 문맹이 없는 곳으로 전해진다. 바다를 비롯해 풍족한 자연 덕에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굶어 죽을 염려가 없고, 기온 또한 온화하다.

다시 말해 천혜의 섬 남해는 이곳을 터전으로 삼은 이들에게는 그 자체가 보물인 셈이다.

외지인 처지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가는 곳마다 발길을 잡는 풍경, 아름다운 산세, 가슴이 확 틔는 바다, 입맛을 사로잡는 산해진미, 관광·여행·힐링을 위해 찾는 이들에게 남해는 보물 같은 섬이다. 특히 다양한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가진 금산은 보물 중의 보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또 명성을 얻으면서 남해의 인지도를 높이고 관광수익까지 창출하고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황금 비단 두른 산

남해 금산(701m·경남도 기념물 제18호)을 명산으로 꼽는 이유는 빼어난 경치 때문이다.

산 자체가 가진 절경뿐 아니라 산이 품은 신비로운 이야기, 장엄한 일출 등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태 또한 매력적이다. 특히 산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바다 조망은 몇 번이고 다시 찾게 한다.

이 덕에 금산은 산악공원이지만 유일하게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중생대 퇴적암 지질로 이뤄진 정상부는 온통 기암괴석으로 뒤덮여 있다. 이는 금산 38경이라 불리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망대, 문장암, 대장봉, 이 태조 기단, 삼불암, 사선대, 쌍홍문, 상사바위, 흔들바위 등 모두 독특한 모습과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금산은 소금강 또는 남해 금강이라고도 한다. 본래 신라 원효대사의 기도처로 보광산이라 불렸지만 이성계가 수도 후 왕이 되면서 은혜에 보답하고자 비단 금(錦) 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산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은 일출이다.

금산 정상이나 보리암 뒤편 화엄봉이 최적의 조망 장소로 꼽힌다. 멀리 미조 쪽에서 시작된 붉은 점은 차츰 하늘과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이때 고개를 돌리면 온통 황금 비단을 두른 금산을 발견하게 된다.

또 가끔은 동행한 사람의 얼굴에서도 홍조 띤 관세음보살상의 미소를 보게 된다.

3대 기도 도량 보리암

금산이 유명해진 데는 보리암의 영험함도 한몫했다.

쌍계사 말사인 보리암은 683년(신문왕 3년) 원효가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보광사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이성계가 백두산과 지리산에서 기도를 드리며 산신령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었지만 답을 얻지 못하자 금산을 찾아 백일기도를 드린다.

이후 현종은 1660년 조선왕조 개국을 감사하는 뜻에서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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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사암에서 바라본 보리암과 금산 정상부. 온통 기암괴석으로 뒤덮여 있다. 장관을 이룬 바위들을 금산 38경이라 부른다. /유은상 기자

남해 금산 아늑함·편안함 안은 완벽한 미인

"누가 뭐래도 금산이 최고지요!"

남해군에서 태어나 현재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서재심(54) 씨의 금산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금산을 접했다. 평소 몸이 약했던 그가 웬일인지 가장 먼저 정상에 올랐다. 그날 바라본 금산 단풍과 상주 해변은 어린 서 씨 기억에 선명하게 찍혔다. 그때부터라고 했다. 서 씨가 금산과 사랑에 빠진 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가을이 되면 금산을 찾았다. 나이가 들어 다시 고향 남해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도 금산이었다.

"망운산은 아버지처럼 듬직한 산이고요. 금산은 흠잡을 데 없는 미인이에요. 지금도 금산은 한 달에 몇 번씩 가요."

풍경도 좋지만, 산에 있을 때 느낌이 아주 아늑하고 편안하다. 봉우리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도 정겹다고 서 씨는 말한다. 그가 설명하는 보리암 이야기도 재밌다.

"금산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 이 세 곳이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인데요. 관음보살은 산 사람의 소원을 잘 들어준다죠. 3대 관음도량이 모두 바닷가에 있는데 왜 그런지 아세요? 파도 소리는 일정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뇌파에 일정하고 편안한 자극을 줘서 오직 기도에만 열중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도 합니다. 특히 금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이런 강한 암반이 형성된 곳에서 기도를 하면 좋은 에너지가 발산된다고도 하죠."

특히 보리암은 전국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이는 원효와 이성계의 스토리텔링이 가장 큰 원인으로 추측된다.

이색적인 자연 배경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병풍 같은 기암괴석을 뒤로하고 아득한 섬과 바다를 마주하고 앉으면 속세를 떠나온 신비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금산은 이성계가 왕이 되고자 기도한 곳이라고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왕에 등극하라는 요청에 대한 결정을 내린 곳, 또는 오랜 고민을 매듭짓고 새 나라 건설을 설계한 곳으로 보는 것이 더 옳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금산은 단순히 '합격', '승진', '건강', '장수', '대박' 등을 기원하기보다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큰 결단이 필요할 때 더 의미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음이 매우 복잡할 때 찾는 곳 말이다.

금산으로 오르는 길은 △복곡주차장∼복곡탐방지원센터(마을버스)∼정상(도보 15분) △두모주차장∼양아리 석각∼부소암∼정상(2시간가량) △금산탐방지원센터∼쌍홍문∼보리암∼정상(1시간) 코스가 대표적이다.

스릴·비경 함께 즐기고 싶다면 '설흘산'으로

금산에 이어 최근에는 설흘산(488m)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앵강만 서쪽에 있는 설흘산은 등산 마니아가 좋아하는 산이다.

정상부 뾰족한 암릉을 타는 스릴이 쏠쏠할 뿐 아니라 바다로 탁 트인 시야가 매력적이다. 등산로는 펜스, 덱, 밧줄 등의 안전시설이 잘 설치돼 불편함이 없다. 설흘산에서 아래쪽으로 시선을 두면 강처럼 고요한 앵강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선을 더 멀리 옮기면 서포 김만중 선생의 한과 그리움이 짙게 밴 노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해무에 휩싸인 여수 돌산반도 인근 섬은 언제 봐도 한 폭의 그림이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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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에서 보는 일출. / 유은상 기자

이처럼 가볍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스릴과 남해 비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은 그리 흔하지 않다. 또 정상에서는 왜구 침입과 재난을 알리고자 돌을 쌓아 만든 봉수대도 만날 수 있다.

류옥근 남해산악회 전 회장은 "제일 높은 망운산이 남해 사람에게 많은 의미가 있지만 저는 설흘산을 최고로 치고 싶다"며 "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360도로 바다가 다 조망되고 병풍처럼 절벽이 스릴 있다"고 추천했다.

하산길에 마주하는 가천 다랭이마을도 설흘산의 가치를 더해준다.

사실 산을 깎아 논을 만들었으니 설흘산이 다랑논이요, 다랑논이 설흘산이다. 45도 이상 산비탈을 깎아 만든 180층 계단식 논의 경이로움은 계절마다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다. 마을에서 이어진 바래길과 가천마을 몽돌해변 등도 설흘산이 덤으로 주는 세트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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