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할리데이비슨 XL883R이라는 모터사이클을 타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된 이후로 숨돌릴 틈도 없이 앞을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일과 생활에 치어 30대 후반에 완전히 방전된 배터리처럼 지쳐버렸다.(고백하건데 나는 결코 훌륭하거나 뛰어난 기자가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잘 해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던 평범한 기자였다.) 모터사이클은 그런 내게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때 두 번째로 탓던 모터사이클이 883이었다. 배기량 883cc짜리였는데 지금은 스트리트 750 모델이 시판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 중에는 가장 작은 모델이었다. 그래도 배기량만 따지면 800cc 경차보다 배기량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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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여차홍포해안도로. 멀리 병대도, 가왕도, 매물도가 그림처럼 떠 있다. 모터사이클은 BMW R1200RT. /조재영 기자

 

자동차는 크기에 따라 A세그먼트, B세그먼트 하는 식으로 나누는데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은 대략 4그룹으로 나눈다. 스포스터 계열, 다이나 계열, 소프테일 계열, 투어링 계열 등이다. 각 계열마다 몇 가지씩 모델이 있다. 스포스터 계열은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다른 계열에 비해 배기량이 작지만 달리기 시합을 비롯해 빠르고 경쾌하게 달리는데 특성이 맞춰져 있는 모델이다. 다이나 계열 역시 배기량이 1700cc나 되지만 같은 배기량의 다른 모델보다 가볍게 설계되어 역동성 있는 라이딩을 할 수 있는 모델이다. 소프테일 계열은 뒷 쇽업쇼버가 차체 내에 감추어져 있어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옆에서 보면 뒷바퀴 휀더 등 부드러운 곡선이 드러나 보인다. 투어링 계열은 말 그대로 장거리 라이딩을 해도 덜 피곤하고 짐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도 많게 설계된 모델 그룹이다. 대표적인 모델이 경찰순찰용 모터사이클이다. 이 모델은 투어링 모델을 베이스로 해서 경찰 업무에 적합하도록 몇 가지 특수 장비를 장착한 모터사이클이다.

마흔의 추억

883을 탈 때 나는 마흔 살이었다. 가수 김광석 씨가 세상을 뜨기 전에 자신의 콘서트 공연장에서 "나이 마흔이 되면 할리데이비슨 타고 싶다"고 말했었다. 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그때 나는 사실 할리데이비슨 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시동을 걸고 밖으로 나가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언제 어떻게 달려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강렬한 햇볕에 살이 익어버릴 듯한 한여름에 지인과 함께 강릉까지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었다.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혼자 883을 타고 거제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학동에서 여차홍포해안도로전망대 쪽으로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이 도로와 전망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도로도 지금처럼 닦여있지 않았다. 좁았고 오르막과 내리막, 굴곡이 심한 비포장 임도였다. 나는 그때만 해도 홍포전망대가 있는지, 그 길이 어떤지 모르고 갔었다. 한참 꼬부랑길을 따라 달리다보니 여차홍포해안도로 임도 입구가 나타났고 "좀 더 가보면 포장도로가 나오겠지"하고 별생각 없이 들어갔었다. 그런데 그건 엄청난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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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여차홍포 비포장 임도에 멈춰 선 할리데이비슨 XL883R. 지금은 추억이지만 그때는 악몽이었던 여행길이었다. /조재영 기자

 

가도 가도 포장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바닥은 자갈이 깔려 있고 먼지가 폴폴 날렸다. 노면에 자갈이 깔려있다는 건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다는 의미다.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잡았더니 아래쪽으로 쭉쭉 미끄러졌다. 모터사이클 무게만 약 250kg 정도였고, 그 위에 내 몸무게까지 얹혔는데 바닥에 자갈이 깔려있으니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 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이지만 넘어지면 혼자서 일으켜 세우기가 버겁다. 넘어지면 안 된다. 다니는 차도 거의 없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길 밖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아차 하는 순간에 생각조차 하기 싫은 장면이 연출될 수 있는 곳이었다. 정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이 길을 왜 왔지?" 하고 후회가 됐지만 이미 한참을 와버린 길이었다.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넘어지지 않고, 길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는데 온 정신과 근육을 집중했다. 마침 연료 게이지에 노란불까지 들어왔다. 연료를 채워야 한다는 표시의 경고등이 들어와도 40km 정도는 충분히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걱정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곳에서는 그 길이 언제 끝날지 몰랐기 때문에 기름 걱정까지 해야 했다.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 나는 고개를 들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땅바닥에 시선을 처박고 육중한 모터사이클의 균형을 잡느라 삐질삐질 땀을 흘리느라 몰랐는데, 바다 위에는 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림같은 섬이 여기저기 떠 있었고,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바다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시동을 껐다. 넋을 놓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가대교가 개통되기 전의 일이었다. 그 무렵까지 거제는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에게는 이상적인 섬이었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차량 통행량이 그리 많지 않았고 해변을 따라 달리는 길은 환상 그 자체였다.

그런데 거가대교가 개통되면서 거제는 더는 이상적인 곳이 아닌 곳으로 변했다. 차량 통행량이 많이 늘어났다. 특히 라이더들이 자주 가는 학동몽돌해변~바람의 언덕 구간은 주말에 상습적으로 정체되는 구간이 됐다.

그리고 그 후에 홍포전망대로 가는 임도는 전체 구간 중 여러 곳이 포장되었고 전망이 좋은 지점에 전망대와 정자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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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여차홍포해안도로 팔각정 전망대에서 본 바다 풍경. 왼쪽 위에 있는 섬이 대병대도, 정면 가운데 있는 섬이 소병대도다. 정면 가장 뒤에 보이는 섬이 매물도와 소매물도, 오른쪽에 크게 보이는 섬이 가왕도다. /조재영 기자

 

다시 찾은 여차홍포해안도로

겨울이라고 마냥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주말에 나가서 좀 달리면 머리와 가슴이 찬바람으로 재충전될 듯했다. 지인과 함께 거제를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 멀지도 않고, 아침에 너무 일찍 나서면 결빙된 길에 위험을 만날 수 있어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나섰다. 지인은 가까운 곳에 살지만 만날 장소를 14번 국도 통영 들머리 학섬휴게소로 정했다. 집에서 출발해 학섬휴게소까지는 40분 정도 걸리는데 거기까지는 혼자서 자유롭게 달린다. 학섬휴게소는 거제 쪽 여행의 만남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간단한 요깃거리도 있고 주유소가 있어 연료도 채울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푸른 바다 풍경은 덤이다.

신거제대교를 건너고 사등면을 지나 사곡에서 거제면 방면으로 빠지는데 아차 싶다. 우리가 들어선 길은 옛길인데 원래 가던 길을 조금만 더 가면 4차로로 새로 난 길이 있는데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잘못 들어선 길이지만 되돌릴 수도 없어 그냥 달린다. 달리면서 생각한다. '이 길을 계속 가면 시간도 더 걸리고 길이 꼬불꼬불해서 겨울이라 위험하다. 틀림없이 새길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달리면서 새길 쪽으로 보고 가는데 마침 새길과 연결되는 도로가 나타난다. 주저 없이 새길로 갈아탄다. 운이 좋다. 삶에도 가끔 이런 소소한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다.

거제면을 지나 동부면에서 해안 쪽으로 넘어간다. 만약 라이딩코스에 등급이 있다면, 오송에서 탑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아마 누구라도 A등급을 매겼을 것이다.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다 마을 풍경과 완만하게, 혹은 급하게 휘어지는 도로의 굴곡이 모터사이클 라이딩의 재미를 더해준다.

여차홍포해안도로는 남부면 홍포선착장~여차몽돌해변 구간이다. 이 구간에 전망대 두 곳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 팔각정이 있는 전망대가 여차홍포해안도로전망대(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다포리 산38-145)다.

팔각정전망대에서 보면 대병대도, 소병대도 등 한 무리의 바위섬이 한폭의 그림처럼 푸른 바다를 장식하고 있는 풍경이 코앞에 보인다. 그곳에서 몇 구비를 돌아 여차몽돌해변 쪽으로 더 가면 다른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서는 병대도, 매물도가 좀 더 멀어 보이지만 또 다른 맛의 풍경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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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거제 바람의 언덕.
왼쪽에 최근에 바다 위로 걷는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 조재영 기자

 

이번 홍포전망대 여행은 저번처럼 고생스럽지 않았다. 아직도 비포장 구간이 제법 남아 있지만 많은 구간이 포장되어 운전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언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과 함께 있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라면 긴장해야 하고 힘든 구간인데 든든한 동료가 있으니 마음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 구경도 실컷 하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여차홍포해안도로를 벗어나서 바람의 언덕에 들러 잠시 쉰다. 바람의 언덕은 사람과 차가 너무 많다. 주차장까지 들어가는데 너무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통영 미래사

통영으로 향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에 올라 전망대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편백나무숲에 둘러싸인 사찰이 하나 보인다. 미래사다. 미륵과 미래라는 말은 그 뿌리가 같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미래사(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길 192)는 역사가 깊거나 규모가 큰 절이 아니다. 작고 아담한 절이며 역사가 짧지만 사찰에서만 찾을 수 있는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찾는 사람이 많이 없어 오히려 이미 관광지화된 대규모 사찰보다 더 조용하다.

효봉스님의 상좌였던 구산스님이 1954년 스승의 수행 정진을 위해 세운 암자였다. 뜰에 있는 삼층석탑에 티베트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대문 옆에 종각이 있는데 십자팔작누각이다. 이런 형태의 누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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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미래사의 편백나무숲에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산책길을 걸으며 명상하기에 좋다. / 조재영 기자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미래사 주변의 편백나무 숲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편백나무를 심어 가꾸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 그 숲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쭉쭉 뻗어 올라간 편백나무가 빼곡한 숲에는 걷기 좋게 질긴 소재로 바닥을 깐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다.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명상을 하면 더없이 좋을 듯했다. 다만 길 위의 여행자는 어둠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겨울밤이 시작되기 전에 집으로 와야 했다.

돌아오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마흔 살에 우리는 행복한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언제 행복해야 하는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나중에라도 행복할까? 행복은 저축되는 것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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