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여섯 번째로 받은 펜더 기타

2009년 12월 15일, 깁슨과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세계적인 기타회사인 펜더사는 노구의 한국 록 대부에게 헌정 기타(Fender Custom Shop Tribute)를 전달했다. 펜더 최고의 장인인 마스터 빌더 데니스 갈루즈카(Denis Galuszka)가 음악인의 특징을 살려 한 대만 제작한 것이다. 스크래치와 흠집 하나하나 과거의 형태를 복원하고, 기타의 칠을 일부러 벗겨내는 등 60년대의 소리를 구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스크래치가 있는 빈티지풍의 검정색 바디와 단풍나무로 된 넥으로 구성된 기타의 지판에는 '트리뷰트 투 신중현'이라고 자개로 새겨 넣었다. 이는 "내 50년 음악역사를 기타로 표현해 달라"는 신중현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펜더기타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연주인, 작곡가, 음악 애호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미국만의 상징이 아닌, 전 세계 연주가들의 로망으로 자리 잡은 브랜드 기타다. 이런 펜더기타는 자사의 기타를 애용하는 전설적인 음악인을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기타를 헌정해 왔다. 지금까지 펜더기타를 헌정 받은 뮤지션은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잉베이 맘스틴, 스티비 레이븐, 에디 반 헤일런 등 기라성 같은 대가들뿐이며, 그 여섯 번째가 신중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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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신중현.

미군 부대 순회공연을 통해 이름을 떨치다

신중현은 1938년 1월 4일, 서울 명동에서 이발사인 아버지 신익균과 미용사인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 후 귀국한 그는,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면서 창고지기 등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살았다. 당시 창고지기를 하면서 고물 라디오로 종일 미군방송을 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음악과의 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신중현은 거의 폐품이 되어 누군가 내다 버린 기타로 연습하며 음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1955년 미8군 연예단을 통해 데뷔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신중현은 미8군 연예단에서 '히키 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미군부대 순회공연은 물론이고 기지촌의 클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미국에서 로큰롤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중, 그런 로큰롤 음악에 맞춰 기타를 연주하는 신중현의 솜씨는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의 기타연주가 공연장에 울려 퍼지면 미군들은 그의 별명인 '히키 신'을 외치며 열광했고, 그는 이를 통해 유명세를 탔다.

1962년 밴드 '애드 포(Add 4)'를 결성하고, 1964년 자신의 첫 앨범이자 한국 록 음악사의 첫 장을 장식하는 애드 포의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애드 포는 그 시절 베이스기타를 도입한 몇 안 되는 밴드였고, 쟁쟁한 로큰롤 밴드 '키보이스' 등과 더불어 새로운 사운드를 도입했다. 다른 밴드들이 서구의 최신 음악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거나 엔카식의 멜로디와 록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면, 신중현은 훨씬 나아가 한국 특유의 로큰롤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신중현이 추구한 새로운 음악은 대중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혔다. 사람들에게 너무 생소했기 때문에 외면받은 것이다. 훗날 음악 평론가들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 무지션의 활동을 이해하지 못 한 한국 대중음악의 한계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록 밴드로는 성공하지 못했던 신중현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자매 듀오 펄시스터즈의 데뷔 음반을 제작하면서부터다. 이때 발표한 '님아', '커피 한잔', '떠나야 할 그 사람'을 통해 뛰어난 프로듀서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 곡들은 우리나라에서 히트한 거의 최초의 로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곡이 됐다.

신중현식 애국가, '아름다운 강산'

신중현은 자신의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발굴한 뒤 곡을 주고 프로듀싱하며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 '신중현 사단'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 가수들을 대거 배출했다. 그는 이때 등장한 박인수(봄비), 이정화(꽃잎), 김추자(님은 먼 곳에), 장현(미련), 김정미(봄) 등의 가수들을 통해 1968~73년 사이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스타 제조기로서 명성을 쌓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프로듀서로 이름을 떨친 신중현은 밴드 더 멘(The Men)을 결성해 1972년 한국 록 음악사상 불후의 명곡으로 칭송받는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대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그의 창작력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만들어진 시대의 명곡이자, 사이키델릭 록과 신중현이라는 한국의 음악인이 만나서 창조해낸 하나의 새로운 세계다. 기타와 키보드, 오보에로 구성된 소리들을 촘촘히 쌓고, 거기에 '환각'이라는 요소를 더하여 10여 분간 연주되는 대곡이었다. 후반부로 가서 모든 악기들이 동시에 터져 나오며 고유의 소리를 높이는 부분은 가히 절정이라 하겠다.

1972년 첫선을 보인 '아름다운 강산'은 신중현도 여러 차례 리메이크를 발표하면서 대단한 애착을 보였고, 이선희(1988년)를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이 음반과 공연을 통해 재해석했다. 현재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며 최고의 곡으로 추앙받고 있다.

청와대의 요청을 거부한 신중현

그러나 '아름다운 강산'이 나온 뒤부터 신중현은 유신정권에 음악 활동을 저해하는, 위협적인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신중현에게 청와대가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신중현이 "할 마음이 없다. 내 생리에도, 음악성에도 안 맞는다"며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신중현은 정권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한 인물의 찬가가 아닌 온 국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건전 가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른 노래를 만들 때보다 훨씬 정성을 쏟으며, 가장 한국적인 음계를 담아낸 '아름다운 강산'을 완성한다. 노래를 처음 선보인 공중파 TV 무대에서 신중현과 더 멘 멤버들은 장발단속에 항의하는 뜻에서 삭발을 하거나, 머리카락이 귀를 덮으면 안 된다는 규정을 조롱하듯 귀만 보이게 핀을 꼽고 나와 20분간 사이키델릭 쇼를 펼쳐 보였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무대가 주말 황금시간대에 TV를 통해 방영됐다.

그는 자전에세이 '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에서 "내 음악이 결코 천하거나 경박하고 나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정권의 압력에 맞서 체제 내적저항으로 대응한 것이다"고 그때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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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의 탄압과 컴백

'아름다운 강산'이 들어있는 이 음반의 최초 버전은 박광수가 메인보컬로 사이키델릭의 여왕 김정미가 코러스로 참여했다. 이후 3인조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1974년 첫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대표곡인 '미인', '떠오르는 태양' 등 10곡이 실려 있으며, 밴드로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최초의 음반이었다.

이즈음 유신정권은 가요정화운동을 주도하며 대중가수 탄압을 시작한다. 신중현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신중현은 대마초를 피웠다는 누명을 써 구속됐다. 고문을 당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며 4개월간 고초를 겪은 신중현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석방됐다.

하지만 그의 시련은 석방 이후로도 이어졌다. 연예인협회의 제명으로 공연이 일체 금지됐고, 그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으로 낙인찍혀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는 쓰라린 현실을 피하기 위해 이태원의 카페에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독주를 들이켰고, 사람이 보기 싫어지는 날엔 낚시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 시기를 두고 신중현은 "록은 험악한 인생을 거치면서 견뎌낼 수 있는 바로 그 힘"이었다면서 힘든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마흔이 넘은 나이로 컴백한 신중현은 뮤직파워, 세 나그네 같은 후속 밴드를 결성했지만, 군사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활동을 전개해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언론과 음악 비평계는 그의 음악사적 의미를 재조명했으며, 1997년에는 봄여름가을겨울, 강산에, 한영애를 비롯한 후배 뮤지션들이 헌정앨범 'A Tribute To 신중현'을 발표했다. 신중현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2006년 은퇴를 선언하고 은퇴공연을 가졌다. 인천에서 시작한 그의 은퇴공연은 전국을 순회하고, 서울에서 45년 음악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며 한국 록 음악계의 전설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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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의 대표곡 '아름다운 강산'.

우리나라 1세대 로큰롤 그룹 시나위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신대철이 박사모가 자신의 아버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아름다운 강산'을 부른 것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피력했다. 누구나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겠지만, 그 노래의 이면을 들여다보았으면 박사모가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앞선다.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 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 곳에 네가 있고 내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 희망을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 마음

 

우리는 이 땅위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 곳에 자랑스런 이 곳에 살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

하얀 물결 넘치는 저 바다와 함께 있네.

그 얼마나 좋은가 우리 사는 이 곳에

사랑하는 그대와 노래하리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 훗날에 너와 나 살고지고

영원한 이 곳에 우리의 새 꿈을 만들어 보고파

봄여름이 지나면 가을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너의 마음 나의 마음 나의 마음 너의 마음

너와 나는 한마음 너와 나

우리 영원히 영원히

사랑 영원히 영원히

우리 모두다 모두다 끝없이 다정해.

- '아름다운 강산' 신중현 작사·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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