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 쓴·몬·끊·길 없고 :

공(空)의 세계에 대한 설명의 이어짐은 계속된다. 인간의 인식과정도 빈탕이며 12인연법도 빈탕이다 보니 고집멸도도 없어진다. 부처는 고(苦)를 더 없는 고통을 일컫는 것이고, 집(集)은 더없는 번뇌이며, 멸(滅)은 더 없는 해탈을 일컫고, 도(道)는 더 없는 다다름이라 이름한다고 했다.

박영호 선생은 "고는 괴롬의 몸이다. 집은 번뇌의 맘이다. 멸은 죽는 것이다. 도는 얼이 사는 길이다. 몸과 맘의 제나(自我)가 죽어야 얼나가 산다는 뜻이다"고 했다. 니르바나에 들면 고통과 번뇌의 생겨남도 그 비롯됨인 욕망의 불길조차 꺼져버린다.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無智 亦無得 以無所得) - 앎 없고 얻도 없다. 얻음이 없으므로 :

그 니르바나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지혜랄 것도 없고 잃고 얻을 것도 없다. <금강경>에서 부처는 수보리 존자에게 이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게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단다.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고 말씀한다.

돌이켜 보면 다섯꾸럼이는 빈탕이며 모든 만유가 빈탕이라서 고통과 번뇌마저 없으며, 그와 같은 사실을 인지할 것도 없는 세계라서 득실(得失)조차 없다고 알려준다. 그것은 공(空)의 세계이며 그것을 깨달음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 반야바라밀다로 간 것이라 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그이(君子)는

하느님을 자강(自强)하는데 쓴다

 

보리살타(菩提薩) - 보리살타 :

범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음역한 것이다. 참에 들어 간 사람이란 말이다. 오온(五蘊)은 모두 공(空)이며 제법(諸法)이 공상(空相)이라 고통과 번뇌도 없고 모든 것이 차별할 수 없는 것이라서, 그것을 몸소 체득한 참 사람이다.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密多故) - 반야바라밀다로 말미암아 :

참사람은 피안의 니르바나의 세계를 거닌다. 다석은 니르바나를 하느님이라 불렀다.

"우리는 하느님을 가지기 싫어한다. 세상에는 하느님이 소용없다. 팔아먹을 수 있다면 팔겠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인 그이(君子)는 하느님을 자강(自强)하는데 쓴다."

글쓴이의 생각에 우리말 '임금'은 신라 때의 '이사금'이며 임금을 한자로 제(帝), 군(君)이라 하여 백성의 어버이로 쓴 왕(王)과는 다른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 천제(天帝)인 하느님을 나타낸 말이 임금(君)이라 군자(君子)는 다석이 바로 말씀한 하느님의 아들인 그이가 되는 것이다. 군자는 하늘이 육체로 나은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얼을 제대로 이어받은 하늘의 자식이기에 이 세상에 참 군자는 몇이나 될까?

심무가애(心無) - 마음의 걸림이 없고 :

보살은 이미 적멸을 체득하여 맘속에서 걸려 마음이 넘어질 수가 없다. 다석은 "견물생심은 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냥 그런 것이 있나 보다 하고 지나갈 것이지 거기에 맘을 살리거나 달라붙으면 안 된다. 사람이라 감정이 있어 잠깐 생심(生心)하다가도 그러려니 하고 자꾸 되(升) 넘겨 비워야 한다"고 했다.

일전에 글쓴이가 경남도람사르환경재단에서 일하는 선배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 선배는 "내가 요즘 창녕 우포늪을 지키고 있는데 달이 뜨면 퇴근한다"고 했다. "선배님 해가 넘어간 늪지는 말 그대로 적막강산(寂寞江山)이겠습니다?", "자네가 적막강산을 어찌 아는가?", "적막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적멸도 알아야 할 나이인데요."

그렇다 인생은 황혼을 알게 되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쓸쓸해진다. 따라서 적막은 언젠가 누구나 느끼게 되지만 적멸(寂滅)은 군자들만 아는 세계이다. 글쓴이는 적멸을 알 나이라고 내뱉었지만 실은 말장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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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 YMCA가 주최한 회갑기념 강연회를 마치고.
맨 앞줄 가운데 앉은 이가 다석,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함석헌이다.

무가애고무유공포(無故無有恐怖) - 걸림이 없으므로 무서움 있을 게 없어 :

요즘 정신질환 중에 공황장애를 앓는 사람들이 많다. 이 병은 멀쩡히 있던 사람의 마음속에서 "곧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갑자기 엄습하는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는 기(杞)나라 사람의 일화를 전해준 기우(杞憂)라는 말을 흔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을 두고 쓰고 있다. 하지만 실은 전쟁과 기아로 처참한 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 때 생겨난, 공황장애를 앓았던 사람들의 표본으로 보면 된다. 실존주의의 철인 케에르케고르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실존을 본 것으로 안다.

 

저만 잘 먹고 살겠다는 사람들

권세 잡고 떵떵거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죄악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글을 보자.

"죽음, 상처, 배고픔, 모욕, 대중의 반대, 악령, 타인에 대한 분노 등 이 모든 종류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무외(無畏)라고 한다. 두려움은 나(Ego)를 없앰으로써 사라진다. 살 줄도 알고 죽을 줄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진리파지자(眞理把持者)가 될 수 있다. 나가 죽었을 때 얼이 깬다(When the ego dies, The soul awakes). 자기 속에 거룩한 불꽃을 지닌 사람은 그 얼로써 죽지 않는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 거꾸로 박힌 꿈꿍에서 멀리 떠났다 :

다석의 말씀을 들어보자.

"우리는 미혹(迷惑) 몽환광(夢幻狂) 상태에 빠져선 안 된다. 저만 잘 먹고 살겠다는 사람들, 권세 잡고 떵떵거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죄악이다. 진리 아닌 데서 나온 생활이다. 크게 조심해야 한다. 이 세상이란 이게 분명히 꿈이지만 꿈인 줄 알지만 아무리 깨려고 해도 꿈속에서 못 깬다. 우리의 이 꿈은 죽어야 깬다. 그런데 꿈인 줄 알고 꾸면 참 좋다. 종교, 신앙이란 좋은 꿈을 꾸는 거다. 좋은 사상은 좋은 꿈이다. 이미 꿈인 줄 알고 꾸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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