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할머니들 사는 이야기를 시로 담고 싶다"

좁다랗고 구불구불한 산청 시골길에 들어섰다. 주소만으로 찾기가 쉽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멀리서 이영자(77) 시인이 혹시나 놓칠세라 집밖에 나와서 손을 흔들고 섰다. 시인의 집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주택에 탁 트인 정원이 인상적이다. 멀찍이 산봉우리가 여럿 보인다. 시인은 그중 하나가 천왕봉이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공기 좋고 전망까지 좋은 이곳에서 절로 시심(詩心)이 흘러나올 듯해 보였다. 지난 2010년 산청으로 이사를 왔고, 2년 살면서 아들 내외와 함께 집을 지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시

이 시인이 글을 쓰는 일은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를 썼어요. 원래 글쓰기를 좋아했죠. 크면 '작가가 되리라' 꿈꿨고요. 선생님들이 글짓기 하면 잘한다고 칭찬했었죠. (웃음). 어머니가 옛날 분인데, 머리맡에 항상 벼루, 먹을 두고 지냈어요. 동네 사람 결혼하면 사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제문도 어머니가 썼고.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다니시느라 바쁘셨고, 어머니는 농사지으면서 글을 쓰셨어요. 저는 그걸 보고 자라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된 것 같아요. 외할아버지도 '미파 선생'이라고 나이 드신 분들께는 이름이 알려진 분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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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자 시인. / 우귀화 기자

7남매 중 외동딸인 시인은 '금지옥엽'으로 컸지만, 결혼 후 삼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남편이 세상을 먼저 떠나면서 힘든 삶을 살았다. 쉰 살에 홀로 삼 남매를 기르고자 마산 부림시장에서 식당을 열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그 시기는 시인에게 시의 싹을 틔울 기회가 되기도 했다.

부림시장 지하실 서쪽 모퉁이에 '성광집'이라는 제일 작은 밥집을 했다. 가게 이름은 앞선 사람이 하던 그대로 뒀다.

속에 담긴 것을 식당 벽면에 건 칠판에 써

"애들 키우는 도중에 제 속에는 할 말이 많았어요. 애들만 키울 때는 애들 키우는 재미가 참 좋았어요. 애 셋을 업고, 손잡고 셋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 애는 내가 낳았다고 자랑삼아 데리고 다닐 정도였죠. (웃음). 그렇게 지내다 도중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식당을 하면서, 지지고 볶고 살던 남편에 대한 그리움, 통곡이 쌓였죠. 식당 벽면에 칠판을 2개 걸어놓고, 하나는 차림표로, 하나는 내 시작노트로 썼어요. 3∼4일에 한 편씩 신작 시를 쓰기 시작했죠. 원망, 애절한 통곡을 써냈죠. 쓰다 보니 내 속에 이렇게 많은 글이 들어 있었나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식당 칠판 노트에 시가 하나둘 쌓이자, 시인들이 집을 찾았다. 고 이선관 시인이 이영자 시인의 단골손님이었다. 이선관 시인은 좋은 식당이 있다고 문인들을 불러 모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밥집은 문화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선관, 황선하, 최명학, 신상철 씨 등이 식당을 자주 찾았다.

첫 시집은 고 황선하 시인의 권유로 시작됐다. 칠판에 시를 쓰고 지우고 없애지 말고, 그걸 묶어서 시집을 내는 게 어떻겠냐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첫 시집 <초승달 연가>(1989년, 도서출판 경남)가 나오게 됐다. 황선하 시인이 서문을 쓰고, 현재호 작가가 표지 그림을 그렸다.

"저는 시집으로 등단한 셈이죠. 이웃 사람이 그 책을 자청해서 내줬어요. '그 집 아지매는 시인이란다'라고 소문이 나면서 식당에 사람들이 더 모였어요. 일곱 평도 안 되는 식당인데, 진짜 바빴어요. 밖에서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했죠."

주변의 도움으로 출판기념회 진행

91년에 2번째 시집 <개망초꽃도 시가 될 줄은>도 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개망초를 시인 자신이라고 여겼다.

"글 쓰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막 쏟아져 나왔다"면서 1994년 3번째 시집 <식당일기>도 냈다. 첫 시집 낼 때 출판기념회를 안 했다고. 고 신상철 경남대 교수가 출판기념회도 열어줬다. 시장이 쉬는 날 이웃한 횟집, 찻집 두 집을 빌렸다. 식당이 너무 작아서 식당에서 할 수 없어서다.

"그때 다녀간 분이 200명이 넘었어요. 당시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출판기념회에 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어요."

10년 후 2004년 <그 여자네 집>을 냈다. 성광집은 20여 년간 운영을 하다, 개인 사정으로 그만뒀다.

이후 아들 내외와 산청으로 이사를 와서 2011년 <땅심>, 2016년 <따라 부를 수 없는 풍년가>를 잇달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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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자 시인. / 우귀화 기자

시인은 타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시를 쓰고 생활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고승하 선생님은 제가 추울 때 밥하고 있으면, 길가 손수레에 파는 목도리를 사 와서 제 목에 하나 걸어주셨어요. 그 정을 못 잊어서 겨울에 출판기념회를 하면, 부조 대신에 목도리를 떠서 주고 있어요. 다른 분들께도 목도리 선물을 많이 하고. 제 시를 고승하 선생님이 노래로 만들기도 하고. 창원대 이근택, 최천희 선생님 등 작곡하는 분들이 명시도 아닌 제 시로 노래를 만들어서 가곡 발표회를 할 때 들려주기도 했어요. 제 시에 날개를 달아줬어요. 넘 덕택으로 산 사람이죠. (웃음)."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시는 어떻게 써 왔을까.

"글쓰기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공부를 안 했는데, 이걸 좋아한다 싶은 것은 어머니의 흐름을 받았는가 싶어요. 외할아버지, 어머니가 그 계통이니, 먹물이 튄 걸까요. 하하."

시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글 시어가 따로 없어요. 사투리도 있고요. <따라 부를 수 없는 풍년가>도 밭에서 일하면서, 아랫집 논을 보면서 쓴 거예요.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시로 표현했죠."

원고지 칸에 빽빽하게 육필 원고를 써온 게 아닌지 물었다. "식당 할 때는 칠판에 글을 썼고, 지금은 책 봉투를 시작 노트로 쓰고 있습니다. 원고지는 안 사고, 밭에서 밭매다 시상이 떠오르면 밭이랑이 원고지가 되는 거죠. 시상이 떠오르면 들어와서 기록을 해 둬요.(웃음)"

대표 시는 무엇일까. 시인은 방안에서 둘둘 말려있는 족자를 들고 나왔다. 가장 '나다운 시'라며, '국밥과 주류 일체' 시를 꺼내 보였다. <땅심> 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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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자 시인. / 우귀화 기자

아들 딸 가진 부모 입장에/다른 사람이 쟤는 주류 일체 집 아이들이다/쟤도 쟤도 하는 것보다/국밥집 아이들이다 라는 말이 좋은 배경 같아서/쇠고기 국밥은 큰 글자로 문 앞에 붙이고/주류일체는 작은 글자로 안벽에 붙였다/장사 끝나면/주류일체 처리는 어른이 하고/국밥만 아이들이 비웠으니/내 아이들은 주류일체와 아무 관계없다고/둘러댈 말까지 준비했는데/허, 그 틈에 숨어든 허리 병 무릎 탈/문 앞에 붙인 것 때문인지/안벽에 붙인 것 때문인지/보탤 말도 뭉갤 말도 찾지 못하고/파스 조각만 대놓고 갖다 붙인다

첫 시집에 들어갔어야 하는 시인데, 나중에야 시집에 넣은 시란다.

시인은 경남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마산교구 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침 기자가 방문하는 날에는 마을 성당 신부님이 다른 데로 가셔서 송별가를 짓고 있다며 메모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시인은 앞으로 어떤 시를 계속 써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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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자 시인. / 우귀화 기자

"산청 와서 보니, 할머니들이 딱 내 또래 할머니들이에요.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그게 다 시더라고요. 어떤 할머니는 시집올 때 너무 가난해서 홑두루마기를 해 와서, 봄에 겹꽃을 보니 참 불쌍하고 부끄럽다는 얘기를 했어요. 아랫동네, 윗동네 할머니 사연을 시로 쓰고 싶어요. 시골 할머니들이 너무 아름다워요. 손은 일을 많이 해서 더덕 같지만, 속은 아직 고와요. 산청이 꼭 옛날 고향에 사는 것 같아요. 여기서 고향처럼 살고자 해요. 설거지하다, 창문 밑에 접시꽃을 보고 어찌나 곱던지 사진을 찍고, 시로도 쓰고 했어요."

성당 갈 때는 한복을 즐겨 입는다는 시인은 성광집을 할 때 손님이 직접 만들어서 준 나무 비녀를 꽂고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은행나무로 만들었다는 비녀는 40년 세월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시인은 "고마워서 아직도 쓰고 있다"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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