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민 기자가 만난 농협 CEO] (12) 양산물금농협 정문기 조합장
현장 중심 활동 '주부대학 봉사·동전 모으기'성과로
지역사회 밀착·환원 중시 "의미있는 나눔 이어갈 것"

농협 조합장이 꿈인 청년이 있었다.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통일벼 농사를 지었고 대풍을 맞았는데도, 수확한 벼 대부분을 집 앞마당에 쌓아두고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가 잊히지 않아서다.

정부에서 수매하는 양이 정해져 있다 보니 농협 직원이나 이장이 임의대로 각 농가에 매상 할당량을 산정해 주는 시스템하에서 어머니는 "농협이 저라모 안된다"며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쉬곤 했다.

제대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남의 땅까지 빌려서 3만 평 규모의 농사를 지었고, 한우와 젖소도 키워봤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소값 파동으로 모든 걸 접어야 했다.

공부를 좀 더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부산으로 나가서 방송통신대학교에 다녔다. 학업과 병행해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가족 생계를 이어가긴 했으나 무척이나 힘들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새마을금고에 입사해 여러 사회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농협 조합장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 양산물금농협 정문기 조합장. 정 조합장은 '자발적인 봉사·전문성 있는 환원' 등의 철학 속에서 농협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박일호 기자

양산시체육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는 등 어느 정도 사회적 기반이 잡혔을 때, 물금농협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조합 내에서 임원이나 대의원 등으로 활동한 경력이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후 다시 시골에서 4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직접 팔아주기 시작했다. 오전에 트럭 한 차를 몰고 도시로 나가서 다 팔고, 오후에 또 한 차를 채워서 도시로 나가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조합장 하려고 저 귀한 딸기를 낙동강에 다 버리고 오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동안 쌓은 인맥을 백분 활용해 농산물 판매에 주력한 결과였는데도 말이다. 조합장 선거에서 한 차례 낙선하고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농업 현장의 실상을 몸소 깨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현재 재선 물금농협장으로 재직하는 정문기(58) 조합장은 "30년 전부터 조합장을 준비해 왔다. 농업 현장의 깊이를 몰랐다. 몸으로 부대끼면서 하나씩 체득해 나갔다. 옛날에는 농협 직원이 농민들 피 빨아 먹는 사람이라고들 했다. 지금은 그런 거 없다. 그거부터 고쳤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물금농협은 신도시로 변모해 하루가 다르게 상전벽해를 이루는 물금읍과 인근 대도시를 주요 판매처로 확보한 원동면을 관할하는 조합이다. 전형적인 도농복합형 농업협동조합이다. 도시형 농협과 농촌형 농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환경에 처해 있는 셈이고, 정 조합장은 바로 이곳 물금농협에서 우리나라 농협의 새로운 미래상을 그리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결합을 도모하면서 상생의 길을 찾고 있었다.

도농 상생 모범인 '주부대학' 회원들과 정문기(맨 왼쪽) 조합장. /박일호 기자 iris15@

"중앙회 차원에서 합병을 독려하고 있긴 한데, 농촌 농협끼리 뭉쳐봐야 별로 실효성이 없다. 중앙회에서 내려주는 지원금 받고 나면, 또 엄혹한 생존경쟁에 나서야 한다."

-도시에서 벌어들인 돈을 농촌에 투입해야 한다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것도 모순이 있다. 신도시에서 금융사업을 통해 돈을 벌었으면 그분들한테 써야지. 농민도 자존심 상하는 거 아닌가. 물론 꼭 필요한 곳에 환원이 되어야겠지만, 요즘 농민도 부자들이 많다. 오히려 이곳 신도시 서민에게 대출 이자 0.1%포인트라도 낮춰 주는 게 나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농협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시는 분도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 차이가 크다. 이 부분이 융합되어야 한다."

신도시와 농촌의 융합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직거래 시스템을 공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었다. 직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면 굳이 농협을 매개로 한 판매 사업은 필요가 없는 셈이기에 이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승합차를 한 대 구입해서, 신도시 주민들 모시고 원동면 투어를 시켜준다. 예산이 그렇게 많이 안 드는 일이다. 좋은 풍경 구경시켜주면 현지 농산물을 사간다. 풍경 구경하고 질 좋은 농산물 구입한 도시민이 예금을 들어주는 거다. 일석이조 상생이다. 대신 우리 직원들은 힘이 든다."

물금농협이 보여주는 도농 상생의 모범은 뭐니뭐니해도 주부대학 활성화다. 주부대학 회원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은 물금농협의 든든한 존재 기반이자, 한국 농협의 나아갈 바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생색내기식 농산물 팔아주기나 봉사활동이라는 비아냥은 물금농협 주부대학에 끼어들 틈새가 없었다. 직거래가 잘 안 되는 농산물이 있다면 주부대학에서 그것들을 들고 와 신도시에서 모두 소비되게끔 하고 있었다. 물금농협 주부대학이 한 번 떴다 하면 판매 행사든 일손돕기든 똑 부러지게 정리되다 보니 그 명성이 대단했다.

정 조합장의 농협에 대한 철학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 단면은 최근 물금농협에서 추진하는 동전 모으기 사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동전 모으기 운동을 하고 나서 일주일 만에 1600만 원이 모였다. 물론 동전을 가져오신 분들 계좌에 다 넣어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로 자체 사업 자금 500만 원 정도를 투입해 경로당에 쌀을 사 드린다. 아마 몇 달 하면 수천만 원 동전이 모일 것 같다. 의외로 각 가정에 잠들어 있는 동전이 많았다. IMF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이 있었지 않나.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만약 전국적으로 동전 모으기 캠페인을 하면 수백억, 수천억 원의 동전이 모이지 않을까 싶다. 업무 시간 종료 후에도 동전 센다고 퇴근 못하는 우리 직원들한테는 미안하다."

-농협도 지역 사정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 듯하다. 그야말로 생존경쟁 앞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내는 곳도 있기는 한데, 물금농협은 지역사회에 뿌리를 착실히 내린 것 같다.

"자연스럽게 물금농협을 이용하게 하는 게 주효한 것 같다. 우리 양산만 하더라도 한 해에 농협 차원에서 70억 원에서 80억 원씩 환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걸 전국적으로 따지면 얼마이겠나. 삼성 등 대기업은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이다. 국내 자본으로, 이렇게 농협만큼 환원이나 봉사활동을 하는 기업이나 단체가 국내에 어디 있겠나.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다. 물금농협은 솔직히 우리 지역에서 알아준다."

농협에 대한 여러 진단과 해석이 분분하긴 하지만 정문기 조합장이 말하는 '농협 철학' 속에서 농협의 밝은 미래 한 단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환원도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무조건 나눠 준다고 좋은 건 아니다. n분의 1로 나눠주기보다 돈을 좀 더 보태서 의미 있게 쓰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또한 이곳 신도시 서민들에게 이자 부담을 낮춰 주고 싶기도 하다. 은행이라는 게 부자들에게 이익을 주면 그만큼 서민들은 어려워지는 구조다.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이익을 덜 가져가면 그만큼 없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거다. 이런 콘셉트로 가고자 한다. 몇몇 조합을 보니까 직원들한테 연말에 500% 보너스를 주는 곳도 있다는데, 그러면 안 된다. 저는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 그걸 조합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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