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백남해 신부님과 논의를 좀 더 나누고 싶었는데 바통을 이어받는 이가 있네요. 하긴 신부님이어서 어느 정도 진정성이 통할 줄 알았는데 그동안 지켜보니 그 논조가 하나도 빈틈없는 몸담은 시민단체 그것이어서 나중에는 '귀측(貴側)'이라는 문구가 자연스럽게 나오긴 했습니다. (1월 3일 자 10면)

딴 분이 이어간다고 달라지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계속 응답에 나서보려고 합니다. 먼저 '유세지역' 진실부터 먼저 응답합니다. 정당성의 입증에는 증거의 중요성을 말씀하였는데 필자의 글에 그 부분이 미흡함도 일정부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지적하는 귀측도 여전히 증거가 부실함에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필자가 '서너 지역'이라고 한 부분의 추상성이 문제라면 귀측도 확실한 사실을 제시해야 하나, 여러 지역과 날짜를 나열하면서도 노산 선생이 정확히 연사로 다 참여했는지는 제시 못 하고 있습니다.

얼핏 날짜까지 있으니 응당 다 참여한 듯 보이나 실상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노산 선생의 연세 57세입니다. 그런데다 그는 정치적인 성향이 아닙니다. 주변의 권고로 억지로 나선 처지에 일정을 다 소화했으리라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굳이 다 참여한 양, 그것도 유세를 주관하고 앞장선 양, 그리하여 독재에 철저히 영합한 양 몰아가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우리는 보고 싶은 것입니다.

다음은 '50년 동안 이론(異論)이 전혀 없다'가 왜 뒤늦게 문제 삼느냐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1960년 4월 15일 자 '조선일보 설문'의 질문은 "마산사건이 촉발된 근본요인은 무엇으로 보십니까?"입니다. 여기에 대한 노산의 답변이 "도대체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귀측은 노산 답변에 대해 '마산사람들은 분개'했고, 그 이유는 '마산의거와 마산시민을 폄훼하고 모독했기 때문'이라고 즉흥 반응이 있은 양 단정하였습니다. 질문은 '마산사건'이라고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거'로 개념이 정리되기 전의 '마산사태' '마산사건'으로 불릴 때입니다. 노산의 답변은 당시로선 정당하고 바른 답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산사람들이 분개했다니요?' 자료를 보면 이 설문내용이 다시 거론된 것은 2003년 7월 28일자 경남도민일보 기사입니다. 경남시사랑문화협의회가 해당 신문을 증거로 가져 나와 '마산의거'를 노산이 '불상사'로 말한 양 발표해서입니다. 귀측은 노산이 3·15의거 직후부터 3·15와 대척점에 선 양 몰아가기 위해 50년을 들먹인 모양이나 이거야말로 심각한 왜곡이고 곡학아세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산은 8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까지 누구도 노산을 귀측처럼 문제 삼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 기류가 있었다면 어찌 그를 문인 최초의 사회장 의례로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뛰어난 고향 문인 한 사람을 그것도 그가 아끼는 고향 사람 몇이 별 뚜렷하지 않은 명분을 들고 나와 처음에는 친일 혐의와 독재영합으로, 친일이 없자 독재와 연관시켜 3·15의거 폄훼로 몰다가 그것도 진실에 부딪히자 이제 생떼성 억지 부리기에 나선 것으로 보여 우려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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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측이 사라져 가는 기념물 하나 보존 못 하게 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유연하게 봐주려 해도 도가 지나쳐 보이는 것입니다. '운상천'은 운상천이지 그것을 '운상 샘'으로까지 변질시켜 '은상이 샘' 죽이기를 할 필요가 있겠는지요? 또 귀측은 우리를 노산 선생을 '우상으로 섬기'는 부류로 모는데, 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귀측의 진실과 거리가 먼 습관성 과장어법의 하나임을 지적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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