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인이다] <1209 이후> (3)재벌을 이기는 노동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민주노총·금속노조 등에서 홍보와 비정규직 사업을 담당한 노동운동가지만 사실 그는 '글쟁이'로 더 유명하다. <한겨레> <경향신문> <프레시안> 같은 매체에 꾸준히 노동 현안에 대한 글을 써왔을 뿐만 아니라 2015년에는 전국 곳곳의 비정규직 현장을 '두 발과 땀으로' 기록한 <노동여지도>라는 책까지 펴냈다. <노동여지도>는 그해 한국일보가 선정하는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직후인 지난해 11월 초부터 서울 광화문광장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박 위원은 "나는 여전히 운동가"라며 "거의 모든 국민이 노동을 하며 살고 있는데 노동을 불온시하고, 소수화하는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글을 쓰게 됐다. 특히 비정규직들을 자주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이들의 상황을 널리 알리는 게 필요했다"고 운동가이자 글쟁이가 된 배경을 밝혔다.

인터뷰는 지난 5일 광화문 근처 한 사무실에서 약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경유착을 풍자한 조형물 앞에 선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고동우 기자

- 이런 질문부터 하고 싶다. 비정규직이나 청년 노동자·실업자에게 촛불집회는 어떤 의미였을까.

"광장에 나온 시민의 적지 않은 수가 비정규직이었다고 본다. 계속 지켜봤는데, 토요일 밤 9~10시 늦은 시간에도 많은 사람이 쏟아지더라. 주말에, 밤늦게까지 일하다 오는 사람들이 과연 누굴까.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젊은 사람, 20~30대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조직 노동자는 몇 번의 집중 집회·총궐기에는 많이 참여했지만 다른 집회에선 오히려 그 수가 적었다. 자신의 일터에서 힘겹게 일하는 비정규직들이 광장에 나와 박근혜 정권과 재벌의 부패·특권을 비판하고 세상을 바꾸자고 외친 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다."

- 비정규직의 요구가 많이 부각된 것 같지는 않다. 정권 퇴진과 정경유착 타파, 세월호 진상 규명 등이 주요 이슈였다.

"그렇긴 하다. 비정규직 문제는 불평등이 핵심이라고 보는데 촛불 현장에서 중심은 아니었다. 난 거꾸로 반성을 하고 싶다. 비정규직 노조나 나 같은 활동가도 많은데 소중한 계기를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 목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비정규직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규탄했고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정몽구 회장 구속을 촉구했다. 산발적이었고 집약되진 못했지만 재벌 체제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했다."

- 재벌 지배체제 개혁이 비정규직에게 왜 중요한가.

"삼성 전자제품을 고치는 수리기사들의 95%가 비정규직이다. 그런 기술자들에게는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주면서 정유라에게는 말 사주고, 최순실에게는 수십억 원을 갖다 바친 게 삼성 아닌가. 현대기아차도 사내하청 비정규직 수만 명의 요구는 외면하면서 그들에게 뇌물을 줬다. 처우 개선과 생계·권리 보장 대신 뇌물·경영 세습에만 몰두한 것이다. 재벌 총수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일부 지분으로 전 계열사를 지배하는 체제가 계속되는 한 폐해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총수 구속·처벌 등 이번에 확실히 심판해야 정경유착의 악습을 끊어낼 수 있다."

- 조선·해양산업 등 경제 전반이 위기다. 구조조정·고용불안 문제가 화두인데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비단 이명박·박근혜 정권뿐 아니라 이전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부터 누적돼 온 문제다. 비정규직·사내하청의 대규모적이고 불법적인 사용을 묵인하거나 방조하지 않은 정부가 없었다. 경남·울산 등 조선업 쪽이 가장 심각하다. 1997년 외환위기 전후로 법망을 피한 불법적 사용이 급속히 늘어났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그나마 나은 데 지금 같은 세계적·근본적 위기 속에서는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 정부와 기업은 비정규직 대량 해고라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소득이 없어지니 자영업자 등도 함께 어려워지고 기술력 유출 우려도 있는 최악의 선택이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정부·기업이 1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노동자 간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나누기' 등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 일자리·노동시간 나누기는 정규직(노조)의 동의 없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정규직 노조가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다 같이 살려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조선·해양 대기업의 성장과 정규직의 높은 연봉이 어떻게 가능했나. 비정규직을 값싸게 부려 먹어 얻은 것 아닌가? 그럼에도 정규직들이 책임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비정규직만 책임지는 방식에 회사와 정규직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다. 안타까울 뿐이다."

- 비정규직-정규직 연대는 오랜 시간 노동운동의 화두였다. 별 성과가 없는 것인가.

"노동운동은 노동 내부의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산별체제 확립과 정규직·비정규직이 함께하는 '1사 1노조' 조직으로 대응했다. '1사 1노조'는 지난 2007년부터 본격화됐는데 의미 있는 성과가 거의 없다. 오히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실정이다. 산별노조는 실패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등 어쨌든 외형적 체제는 갖추었다. 산별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게 문제다. 산별교섭을 통해 원-하청 불공정 거래 등을 해결해야 하는데 기업 쪽에서 나서지 않고 있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게 촛불의 정신 아니겠는가. 비정규직이나 노동운동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민주노총이 '박근혜 정권 퇴진'과 관련한 총파업 투표를 부쳤는데 울산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노조에서 부결됐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은 광장에서 이야기하는 재벌 해체, 총수 구속에 얼마나 동의할지. 외환위기 이후 지난 20년간 재벌의 경제 규모와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그러면서 정규직 노동자도 많은 혜택을 입었고 연봉도 1억 원 가까이 받게 됐다. 1억 원씩 받으면서 과연 세상을 갈아엎자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잃을 게 너무 많아진 것 아닐까? 같은 일을 하는데 누구는 최저임금을 받고 누구는 1억 원씩 받는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체, 비정규직의 독자적 조직체 같은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기존 조직은 비정규직이 변혁의 주체로 나서는 걸 가로막고 있다. 곳곳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청년 알바, 비정규직, 실업자가 점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촛불집회도 그 현장이었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대통령 한 명 끌어내리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노조를 만들고 일터를 바꾸어야 한다."

- 올해 대통령선거가 있다. 비정규직 문제 중 꼭 이슈화·의제화되어야 하는 사안이 있다면.

"상시업무는 비정규직을 쓰지 못하도록 근본적으로 막아야 하고, 최저임금도 올려야 한다. 사실 대선까지 기다릴 문제도 아니다. 촛불 민심을 이어받아 지금 당장에라도 국회에서 논의하고 관철해야 한다. 재벌 해체, 선거연령 인하, 법인세 인상, 고소득층 소득세 인상 등을 왜 하지 못하는가. 정치권이 대선 유불리만 따질 뿐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정치는 어떻게 바꿔야 한다고 보는가.

"우리 사회 가장 후진적인 곳이 여의도란 생각을 한다. 새누리당뿐만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도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와중에 좌고우면하지 않았나. 사실 박 대통령 탄핵을 이끈 건 광장의 시민이었지 야당이 아니었다. 비정규직이든 청년이든 누구든 스스로 정치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부정적인 것, 왠지 거리를 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은데 넘어서야 한다. 재벌과 보수언론, 검찰 등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정권교체, 대통령 한 명이 바뀌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시민이 정치 주체가 돼 자기 목소리를 낼 때, 자기 일터에서부터 하나하나 모순에 맞설 때 세상은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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