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바닷길이 끝나니 이번엔 산길이다. 남해바래길 연재를 끝내고 경남의 산 연재를 시작했다.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하지만, 입산(入山)을 즐기는 것이지 등산(登山)에는 딱히 취미가 없다.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은 물론 중국 태산이나 네팔 안나푸르나 라운딩까지 제법 산을 타긴 했다. 우리나라 산 중에서는 한라산이 가장 힘들었다. 고산병으로 죽을 고생한 히말라야는 말도 하기 싫다.

경남의 산 첫 기사로 나간 지리산 역시 지독했다. 하필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다. 등산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지리산은 산 머리에 가득 구름을 이고 있었다. 먼지 같은 얼음 가루들이 사방으로 날렸다. 구름이 얼어서 생긴 것들이다. 하산하는 등산객은 정상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계속해 오르는 것밖에 달리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천왕봉은 바람이 심해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리산은 잠시 구름을 걷고 풍경을 허락했다.

하산길은 더욱 힘들었다. 미친 짐승 같은 바람이 헐벗은 나뭇가지를 마구 할퀴고 지나갔다. 바람을 견디는 나무들은 북극 같은 소리를 냈다. 아이 팔뚝 만한 가지들이 후두두 부러져 내렸다. 해는 진즉에 산등성이를 넘었다. 낮도 밤도 아닌 산길을 묵묵히 걸었다. 묵묵히 걸으면서도 기분은 잔뜩 고양돼 있었다. 지리산은 이 지독한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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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숙소에서 오한이 든 몸을 웅크려 녹였다. 비몽사몽간에 계속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는 달콤했다. 또 몰아치고, 또 몰아치고 그러다 푹 잠에 빠졌다. 바람은 첫 취재를 축복하는 지리산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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