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적 가치 좇지 않고 공동체서 생존…구성원이 문화 공유하며 '뿌리'내려야

5억 년 전 지구상에 생물은 동물과 식물로 분화됐다고 한다. 두 가지 생명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동물은 움직였다. 살기 좋은 곳, 안전한 곳을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식물은 이동을 포기하는 대신 뿌리를 내렸다.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적응하며 생존하기로 했다. 우리는 동물이다. 식물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이 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식물의 세계를 알려주고 있다. 식물도 소리를 알아듣고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감각은 무려 스무 가지에 이른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오감에 네 배나 많은 숫자다.

물론 동물의 공격은 감당하기가 어렵다. 도끼질 하는 나무꾼을 만나면 찍혀 쓰러질 수밖에 없고, 굶주린 소를 만나면 이파리가 죄 뜯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식물은 기관(Organ)을 갖지 않기로 했다. 동물은 뇌로 생각하고, 허파로 호흡하며, 심장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식물은 따로 기관을 두지 않는 대신 생존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온몸으로 분산시킨 것이다. 덕분에 식물은 개체의 대부분이 파괴돼도 다시 소생할 수 있다. 동물은 중요 기관 하나만 고장나도 죽지만, 식물은 10%만 살아 있어도 회복이 가능하다. 이동성을 포기한 식물의 놀라운 생존전략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회에 초대된 이탈리아의 시민경제학자 루이지노 부르니 교수는 식물의 이와 같은 생존전략을 언급하며 '식물성 기업'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보다 긴 안목과 지속성을 고민한다면 식물에게서 지혜를 얻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성 기업은 대부분 창업자를 중심으로 수직적이고 계층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의 흐름을 따라 국경 넘어 수시로 이동하는 특성도 동물을 닮았다. 동물성 기업은 경영자가 사고를 당하거나 핵심 부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회사 전체의 위기로 번진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뒤 애플이 좋은 예다. 반면 식물성 기업은 식물이 온몸으로 호흡하고 소통하듯이 기업 구성원 모두가 같은 비전과 문화를 공유한다. 한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며 지역 내 다른 기업이나 경제주체들과도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구성원들은 수평적인 연대감과 자발성을 공유한다. 따라서 경영진이나 핵심부서에 문제가 생겨도 식물성 기업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도 식물기업 사례가 있다. 2005년 1월 22일 대전 빵집 성심당은 공장이 전소되는 치명적인 화재사건을 겪는다. 이미 대출 50억 원을 끼고 매년 이자만 3억 원을 갚아야 했던 성심당 사장은 선대부터 이어받은 빵집 경영을 마침내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물성 기업이라면 핵심기관인 뇌와 심장이 멈춘 셈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직원들이 "잿더미가 된 우리 회사 우리가 살리자"란 현수막을 내걸고 백방으로 복구작업에 매달려 6일 만에 다시 빵을 구워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대전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성심당을 찾아와 불나기 전보다 30%나 많은 매출을 올려줬다. 사장이 포기한 회사를 직원들과 시민들이 다시 살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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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우리는 지나치게 동물적인 가치를 신봉해왔는지 모른다. 좀 똑똑하다 싶으면 서울이나 해외로 떠날 궁리부터 하지 않았는지, 사업이 좀 잘된다 싶으면 대처로 나가 큰돈부터 만질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가까이 사는 이웃과 튼튼한 유대관계를 만들기보다는 대도시 유력인사에게 줄부터 대려고 하지 않았는지. 지역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모습을 '뿌리내린다'고 표현하는 걸 보면 우리는 이미 식물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 상상을 구체화해 보자. 뿌리내리고, 연대하고, 서로 지지하는 지역 도시 공동체의 꿈을 이제라도 함께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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