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강 동백 이야기

동백은 사철 푸른 겨울 꽃나무다. 거제를 대표하는 동백이 피기 시작하는 11월부터 이듬해 4, 5월경까지 남도의 섬은 온통 붉게 타오른다.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를 지나오는 길에 철 늦은 단풍이 마지막 잎새를 떨구고 나목으로 떨고 섰다. 해금강 마을 주차장 천년송식당 옆으로 난 돌계단을 오른다. 초겨울의 짙푸른 녹음으로 덮인 동백 터널을 올라 전망대에 오르면 역시 동백의 반짝이는 초록을 머리에 인 거대한 바위섬과 사자가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모양의 바위가 손에 잡힐 듯 바다에 솟아 있다. 명승 1호 오대산 소금강에 이은 명승 2호 해금강이라 불리는 갈도(葛島)다. 바위가 칡뿌리처럼 얽혀 있다 하여 갈도라 부르는 이 바위섬은 약초가 많아 약초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배를 타고 해금강 관광을 할 때 십자 동굴과 사자 바위 등이 있는 바로 그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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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금강 마을. / 박보근 노동자

남해의 여러 섬과 제주도에도 전해지는 서불과차 이야기가 이곳에도 있다. 2200년 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영생을 누리고자 서불에게 동남동녀 삼천 명과 함께 해 뜨는 동쪽에 있다는 삼신산으로 가서 불로초를 구해오라 명한다. 삼신산인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은 각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일컫는다.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온 서불은 불로초를 찾느라 남해안을 뒤지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자신이 다녀갔다는 것을 바위에 새겼다. 그것이 서불과차 마애각이라 한다. 불로초를 구하지 못한 서불은 빈손으로 돌아가 죄를 물어 죽임을 당하느니 유람이나 하며 동남동녀와 실컷 노닐다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영주산이라 불리는 제주 한라산에서 황기를 구해 중국으로 돌아가 진시황에게 불로초라고 바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타깝게도 해금강의 서불과차 마애각은 태풍에 바위가 떨어져 나가 소실되어 그 이야기만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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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운영하는 동백 방앗간. / 박보근 노동자

이제 막 붉디붉은 꽃잎 열리고 노란 꽃술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며 동백이 피어난다. 꽃말은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한다'와 '청렴'과 '절조'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겨울에 피기 때문이다. 나목들의 앙상한 가지가 바람에 떨고선 엄동설한 윤기 흐르는 초록을 살짝 덮은 하얀 눈 사이를 핏방울처럼 비집고 나선 꽃의 자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우아하고 고고하다. 동백은 피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지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꽃잎이 한 장 두 장 바람에 날리며 흩날리는 것이 아니라 꽃가루받이가 끝나면 어느 날 갑자기 꽃송이 통째로 툭! 떨어져 버린다. 마치 죄인의 목이 망나니의 칼에 툭! 떨어지는 듯 하다 하여 꺼려하는 이도 있지만 아니다. 동백은 시들고 추해져서 떨어지는 꽃이 아니다. 떨어져서도 온전히 그 자태를 흩트리지 않는 당당한 꽃이다. 벌 나비 하나 볼 수 없는 한겨울에 피어서도 동백은 꽃가루받이를 하고 열매 달린다. 살아남기 위해 동백은 새를 불렀다. 하얀 와이셔츠에 연둣빛 연미복을 차려입고 흰 테 안경을 쓴 꼬마 신사 동박새다. 동박새와 동백은 공생관계로 먹이 없는 겨울에 동박새는 동백에게서 꿀을 얻고 동백은 꽃가루받이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지저귐이 앙증맞은 동박새와 동백 사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성질 고약한 왕이 살았다. 그에게는 어질고 순한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자신의 불통 폭정에 실망한 백성들이 어진 동생에 대한 신망이 날로 두터워지자 왕위에 위협을 느꼈다. 동생을 변방의 황무지 땅에 영지를 내주어 쫓아냈건만 왕은 그래도 불안했다. 왕에게는 대를 이을 후사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하던 왕은 은밀히 자신의 몸종 하나를 키워 후계자를 만들기로 한다. 그래야만 퇴위하고 나서도 자신의 실정과 폭정을 덮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후계자로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변방으로 내쫓은 동생에게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대리청정을 맡긴 몸종의 전횡으로 나라 꼴이 우습게 되자 왕은 급기야 조카들을 제거할 끔찍한 궁리까지 한다. 동생에게 사신을 보내 조카들 하례를 받고자 하니 입궐시키라 명한다. 동생이 이를 눈치채고 아들들을 피신시킨 후 죄수 두 명을 아들처럼 꾸며 입궐시키나 탄로 나 버린다. 죽음 앞에 처한 죄수들이 폭로해버린 것이다. 이에 왕은 피신시킨 두 조카를 몰래 붙잡아 묶어 놓고 동생을 불러들였다. 가짜 조카를 좌우에 앉히고 당하에 꿇린 진짜 조카를 가리키며 동생에게 말한다.

"짐이 조카들의 하례를 받고 매우 흡족했는데 저 두 놈들이 감히 왕의 조카라 참칭하고 다녔다 하니 괘씸하다. 그대의 아들이라 기망하였으니 이 칼로 그대가 직접 처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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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으로 만든 제품들. / 박보근 노동자

차마 아들의 목을 칠 수 없었던 동생은 받아든 칼로 자신의 목을 쳐서 자결하고 두 아들마저 왕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세월이 흘러 동생의 목이 떨어진 자리에서 나무가 크게 자라더니 핏빛처럼 붉은 꽃이 피고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더란다. 어느 날부턴가 작은 새 두 마리가 날아들어 꽃 속에 얼굴을 묻고 부비고 하더니 꽃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열리고 점점 자라 별처럼 벌어지니 그 속에 세 조각의 까만 씨앗이 꼭 보듬어 끌어안고 있더란다.

한려수도의 시작인 이곳처럼 끝자락인 여수의 오동도에도 울창한 동백이 유명하다. 그런데 동백이 지천인데 왜 오동도가 됐을까. 원래 오동도에는 온통 오동나무만 자라고 있었다. 때는 고려 후기 공민왕과 함께 개혁 정치를 펴던 국사 신돈에게 첩보가 날아든다. 여수 오동도에 인근의 봉황새가 날아든다는 것이다. 봉황이 오동나무에 깃들면 제왕의 기운이 있는 곳이라 신돈은 불안했다. 마침 전라도의 전(全)자도 왕이 숨어 있는 형상이다. 하여 봉황이 깃들지 못하도록 오동도의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으나 나라는 이성계에게 넘어가 망하고 말았다. 

이때 조선을 섬기길 거부한 고려 유신이 아내와 함께 오동도로 귀양을 와 살게 되었다. 밭을 일구고 고기를 잡으며 귀양살이나마 행복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 나간 사이 왜구들이 들이닥쳤다. 겁간하려는 도적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도망치던 아내는 절벽으로 내몰리자 치마를 덮어쓰고 바다로 뛰어내려 죽었다. 뒤늦게 죽은 아내를 발견한 남편은 슬피 울며 아내를 오동도 가장 높은 곳에 장사 지냈다. 몇 년 뒤 아내의 무덤에서 나무가 자라나더니 여인의 정절을 나타내듯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 핏빛 붉은 꽃을 피우고는 절벽에서 떨어지듯 툭툭 떨어졌다. 이후 여수 오동도에는 동백이 울창해졌다고 하며 이곳의 동백꽃을 따로 불러 여심화(女心花)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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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이 들어있는 열매. / 박보근 노동자

해금강 유람선 매표소 1층 특산물 판매장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동백 관련 상품들이다. 동백기름으로 만든 제품과 동백 열매껍질을 가공하여 만든 액세서리 종류가 돋보인다. 동백 씨앗에서 착유한 동백기름에는 올레인산이 풍부하여 피부 보습과 진정 효과가 뛰어나고 아토피 치료에 좋다고 한다. 동백기름을 첨가한 화장품을 직접 발라본 아내가 감탄한다. 정제하여 식용으로도 쓰이고 정밀을 요구하는 기계의 윤활유로 사용되는 등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옆 액세서리 진열장에는 여러 가지 브로치나 목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가 진열되어 있다. 손으로 직접 가공한 제품이란다. 은은한 듯 화사하고 투박한 듯 맵시 있다. 몇 해 전부터 취미로 동백 껍질 장신구를 만들어 솜씨가 제법인 아내도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씨앗을 거둔 빈 열매껍질의 화려한 변신을 찾아 동백 장신구를 만드는 마을 기업을 찾았다. 자신의 횟집 식당 한 쪽 구석에 작업장을 차려 놓고 한창 작업 중이던 마을 기업 대표 김옥덕(63) 여사가 아내의 옷깃에 달린 동백 브로치를 보고 반색을 한다. 동백 브로치가 유행하게 된 것은 4년 전 중국의 자매결연 도시 방문단이 거제를 찾았는데 거제 특산품을 발굴하여 선물하려고 만든 것이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열매껍질이다 보니 처음에는 잘 부러지고 색을 입히는데 단조로워 조잡했으나 여러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은 멋진 장신구를 만들게 되었다. 디자인 등록과 특허 출원을 내어 마을 기업을 만들어 홍보를 하고 있으나 전시하고 알릴만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다고 했다. 해금강 동백이 다른 모습으로 활짝 피기를 기원한다는 덕담을 드리고 돌아 나오는 길 바닷가에 철 이른 동백이 툭툭 떨어지고 있다. 평일 한낮인데 방파제 끝에 조선소 작업복을 입은 사내 서넛이 소주병을 옆에 두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하늘 아직

눈이 부신데

꽃송이 진다

꽃잎 붉디붉고

꽃술 노랗게

아직 시들지 않았는데

툭!

꽃송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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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금강의 갈도. / 박보근 노동자

나무에서 잘린 동백 한 송이

떨어져 헤진 자리

벌 나비 없이도

쓴 열매 달리고

아린 씨앗

야물게 부둥켜안고 익어간다.

- '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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