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34) 마지막회

친구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피니스테레를 향해 걸어갈 준비를 합니다. 이제 또 저 혼자 남게 되네요. 정말 섭섭했고, 저도 시간만 된다면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모두에게 깊은 포옹으로 아쉬움의 작별을 했습니다. 모두 떠나고 조용해진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함께했던 시간이 떠오르며 울컥해지더군요. 이곳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지만 오늘은 그 느낌이 다릅니다.

아침을 먹고 버스터미널로 갔는데 너무 일찍 도착했네요. 스페인에서 혼자 하는 버스 여행은 처음이라서 긴장했나 봐요. 피니스테레로 가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는 않아요. 한 시간이나 기다려 버스를 탔어요. 버스를 타고 가며 친구들은 며칠을 또 이 길을 걷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며 친구들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어요.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 = 두 시간 가까이 가다보니 버스 차창에 바다가 액자처럼 펼쳐지고 있었어요. 대서양이요. 몇십 일을 밀밭과 산만 보다가 펼쳐지는 바다를 보니 가슴이 툭 터지더군요.

피니스테레. 순례자들의 물건이 걸린 탑.

버스에서 내리는데 그 앞에 미국인 켈리 모녀가 서 있는 거예요. 정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보니 더욱더 반가웠어요. 서로 끌어안고 반가움을 나누었지요. 켈리 모녀는 이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짧은 만남이 더욱 아쉬울 뿐입니다.

땅끝까지 가는 데는 30~40분을 걸어야 했어요. 한쪽으로는 대서양의 멋진 바다가 펼쳐져 있긴 하지만 감상만 하기에는 너무 덥습니다. 오늘은 배낭도 없는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이 짧은 거리도 힘겹게 느껴집니다. 드디어 땅끝에 도착했습니다. 0.00㎞ 표지석이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야고보 성인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곳에 제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혼자서요.

스페인의 땅끝 피니스테레에 있는 순례길 표지석. 0.00 ㎞가 표시돼 있다.

대서양의 땅끝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이곳에서는 혼자인 것이 싫군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너무 멋지지 않으냐고요. 그순간 누가 알은 척을 합니다. 뒤돌아보니 순례길 동료였던 이탈리아 3인방 중의 하나였어요. 어제 산티아고에서 보기는 했지만 여기서 또 만나네요.

피니스테레, 이곳에선 사람들이 순례를 마감하며 신발을 태우는 의식을 했다고 해요. 요즘은 이런 일이 많이 없어지긴 했어도 소지품을 걸어 놓는 기둥이 있었는데 많은 것이 걸려 휘날리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신발을 태우고 소지품을 걸어 놓는 걸까요?

어느 순례자가 두고 간 신발과 함께.

◇짧은 재회와 긴 이별 = 걸어서 이곳까지 왔었더라면 감회가 달랐겠지만 버스를 타고 온 피니스테레는 그냥 관광을 왔다가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날도 덥고 오후 3시 차를 타고 나가려고 서둘러 그곳을 떠나왔지요. 내려와서 대강 요기를 하고 산티아고 가는 버스를 탔는데 길이 다른지 이번에는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예요. 처음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미국 교포 언니랑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넉넉하네요.

광장에서 언니를 기다리는데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다시 만나다니요. 저쪽에 낯익은 모자가 나타났습니다. 순례길에서는 모두 단벌신사들이어서 옷만 보면, 모자만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둘이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지요. 간단히 카페에 가서 맥주를 한잔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미국 교포 언니와 아쉬운 이별.

그런데 세상에, 그동안 언니는 한국에 계신 엄마가 돌아가셨답니다. 함께 걸을 때 엄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돌아가신 거지요. 산티아고 순례 중이라서 한국에 가지 못했고 상심이 커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추슬렀다고 하더군요.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언니는 생각보다 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바람에 수도원 알베르게에서 며칠을 머무르다가 이곳저곳을 더 둘러보고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요. 시간이 많은 언니가 부럽네요. 깊은 포옹과 함께 또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언제 만나서 긴 이야기 나누기로 하고요.

한인 민박 주인 데이비드는 참 친절했습니다. 여태까지 숙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깨끗한 데다 넓기도 하고요. 한 달 넘게 알베르게에서만 자다 보니 수영장 딸린 이 집이 궁궐같이 느껴졌어요. 더구나 오랜만에 한식 밥상이 그득히 차려진 걸 보니 식욕이 더욱 당기더군요. 우아하게 와인을 곁들이긴 했지만 걸신들린 사람처럼 배부르게 식사를 했습니다. 함께 묵는 한국인들은 여러 경로로 이곳에 왔는데, 같은 길을 걸은 사람과도 전혀 만난 적이 없어 신기했어요. 서로 지금까지 무용담을 나누었지요.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라서 그 느낌을 아니까 말이 잘 통하더군요. 그런데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서인지 졸음이 쏟아져요. 인사하고 깨끗한 이부자리로 쏙 들어가 깊은 잠을 잤습니다.

◇아디오스, 산티아고!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주룩주룩 옵니다. 산티아고에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비가 오는 건 처음이네요. 제가 가는 걸 아쉬워라도 하는 걸까요? 걷는 내내 날씨가 좋아서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드네요. 아침을 든든히 먹고 출발 준비를 합니다. 데이비드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에 도착, 공항직원에게 '올라'하고 인사를 하는데 '아, 이젠 이렇게 인사하는 게 마지막이구나' 싶어 또 울컥합니다! 비행기 출발을 기다리며 공항 로비에 앉아 있으니 그동안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함께 걸으며 힘이 되어 주었던 친구들, 많이 그리울 거예요. 너무나 아름다워 눈을 황홀하게 했던 풍경들, 그리울 거예요. 수없이 마주했던 나 자신과의 소중한 시간, 정말 그리울 거예요. 수없이 했던 '올라, 부엔 카미노'란 인사말, 아~ 참 그리울 거예요. 그동안 집 생각이 안 나서 신기할 정도였는데 오늘은 갑자기 집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나를 기다리며 혼자 지내고 있을 남편이 못 견디게 그립습니다. 이제야 집에 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면서 자꾸자꾸 시계를 들여다봅니다. 마지막으로 피니스테레를 향해 걷는 친구들에게 안녕이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저는 산티아고와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

아디오스, 산티아고!!! <끝>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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