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의거 폄훼 발언을 독재정권 저항으로 주장…이은상 출생 전부터 존재한 동네 공동우물일 뿐

적어도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자료나 증거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추론과 짐작은 객관성도 설득력도 없는 일방적인 자기주장일 뿐입니다.

오하룡 님은 '다시, 백남해 신부님께'라는 제하의 재반론(본보 12월 22일 자)에서 이은상의 이승만·이기붕 정부통령 후보 지지유세에 대해 "노산 선생은 불과 두서너 지역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전국 각지를 순회한 양 과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언론자료를 검색해 보면 이은상은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전국유세를 다닌 기록들이 나옵니다. 대구(1960년 2월 27일) 인천(2월 28일) 대전(3월 5일) 부산(3월 6일) 마산(3월 9일) 진주(3월 10일) 경주(3월 12일)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훨씬 많은 지역을 돌며 유세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지만 자료의 한계인지 능력의 한계인지 지금까지는 안타깝게도 이 정도밖에 자료를 찾지 못했고 백 신부님은 그 사실만을 적시했을 뿐입니다. 대뜸 과장했다고 질타하는 오하룡님의 글을 읽고 기가 막혀 백 신부님께 반론을 쓰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1960년 4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3·15의거에 이어 4·11항쟁이 연달아 일어난 마산사태에 대해서 각계각층 인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그때 이은상이 마산에서 일어난 사태를 "도대체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고 한 말을 두고 당시 마산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그 말은 분명히 마산의거와 마산시민을 폄훼하고 모독한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지난 50여 년 동안 마산에서 전혀 이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은상이 이승만을 지탄한 말이라며 뜬금없이 이은상을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한 민주인사로 둔갑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하룡 님을 비롯한 몇몇 문인들이지요.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전국 유세장에서 "이승만은 성웅 이순신 같은 분으로 이 혼란한 나라를 구할 유일한 분이시다"라고 열 올리던 사람이 불과 며칠 사이에 반이승만 인사로 돌변했다고요? 그런데 이어진 그의 말은 "지성을 잃은 데모" "비상식적인 사태" "무모한 흥분" "과오(3·15의거)와 과오(4·11항쟁)는 결국 이적행위"라는 따위의 언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은상이 이승만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견강부회입니다. 또한 이은상은 이승만뿐만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독재자들에게 아부하고 부역한 사실이 뚜렷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다음은 오하룡 님 측 문인들이 이은상 우상화의 대표적 기념물로 만들어 놓은 '은상이 샘'을 생가우물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요? 전문수, 조현술, 김복근, 김교한 이분들 다 오하룡 님과 생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분들이 맞지요? 바로 그분들이 글을 쓴 셀프자료들을 근거로 창원시가 "생가우물"이라고 단정하여 "철거불가"를 선언한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공동우물"이라고 반박했고요. 그런데 우리가 일제 강점기 토지 관련 대장까지 다 들고 나와 증거자료로 들이대자 이제는 자신들이 마을 공동우물이란 걸 다 알고 있었고, 동네 사람들이 은상이 샘이라 부른 것을 중시해 보존에 관심을 두었을 뿐이라 말하는 오하룡 님! 님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들이 한 말과 행동을 모조리 부인하고 말 바꾸는 최순실 청문회 증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아무튼 공동우물이라고 인정하신 것은 다행한 일이나 공동우물의 이름은 물이 맑다하여 '은새미' 또는 운상(雲上)천 옆에 있다하여 '운생이새미'로 불렀다는 것도 인정하셔야죠. 이은상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우물을 사람들이 이은상을 지칭하는 은상이 샘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게 본인들이 생각해도 이상하고 어색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님들에겐 우물의 소유가 생가냐, 아니냐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게 진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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