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인이다] (1) 소비자 주권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은폐'에 소비자 분노
함께 뭉친 소비자 "제품 생산·유통 적극 참여"

소비자 8대 권리를 아시나요? 기업보다 상대적 약자인 소비자를 보호하고자 정부가 법으로 정한 권리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로 이어진 옥시 불매 운동, 그리고 절반의 성공은 소비자 권리를 알지도, 행사하지도 못한 우리를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장면 1. 뒤늦은 후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미생물을 죽이는 살균제라고 하는데 우리는 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가습기 안쪽에 빨갛게 피어오른 물 때를 확인하고 '인체 무해'하며 '아이에게도 안심'하라는 가습기 살균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소비자가 있다면 손 들어 봤으면 한다. 갓 태어난 아이를 더 사랑한다는 게 참사를 불렀다. 1~2일에 한 번꼴로 가습기에 살균제를 넣었고 100일까지 건강하던 아이는 폐출혈로 호흡을 못하고 110일을 살다 떠났다.

유사 피해 신고는 5년간 5294건, 사망은 1098건이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이 수치가 잠재적 피해자의 1% 수준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5월 경남환경운동연합, 경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경남소비자단체협의회 등이 옥시 제품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에 사는 이현정(37) 씨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수면 위에 떠오르고 나서야 소비자가 주인으로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 참회했다고 말했다.

"설거지를 할 때도 세제를 다 헹궈내는데 살균제를 넣고 그대로 쓰라니요. 그것도 코앞에서. 우리도 모르게 소비를 권하는 광고 홍수 속에 정작 안전과 관련한 알 권리는 침해받는 것 같아요.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우리 가족 건강만 염려하던 다소 소극적인 생각을 확장시킨 계기가 됐어요."

현정 씨는 8살·9살 딸아이를 둔 평범한 주부다. 특이점이 있다면 아이쿱생협(iCOOP) 조합원이다. 아이쿱생협은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운영하는 사업체를 기반으로 윤리적 소비와 생산을 실천하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다. 현정 씨는 2008년 광우병 사태 이후 밥상 안전에 관심을 뒀고 아이쿱생협을 통해 무상급식, 탈핵, GMO(유전자변형식품) 표시제 운동에 참여했다.

▲ 삽화 서동진 기자.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경남도민 10명 중 9명의 인식 변화를 불러왔다.

위해성 불안감은 치약, 화장품, 헤어에센스 등 생활화학제품 전반에서 사실로 확인됐고 기업·공공기관 신뢰성 하락으로 이어졌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옥시 불매운동 배경으로 피해 규모와 대중의 분노를 꼽았다. 최 소장은 제조사가 서울대 교수를 매수하고 법무법인 김앤장을 동원해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연구 결과를 조작·은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고 되짚었다.

#장면 2. 엄마와의 대화

"한 날은 시골에 계신 친정 엄마를 찾았는데 옥시크린 제품이 1+1행사 테이프로 묶여 있더라고요. 엄마께 '불매운동하는 제품인 걸 모르냐'고 물었더니 '가습기 살균제도 아닌데 왜 그러냐, 주위에서 다른 건 괜찮다고 하더라' 이런 말씀을 하세요. 친정에 갈 때마다 지적을 하니깐 이젠 숨겨놓기도 하고 얘길 하면 다툼으로 끝이 나요. 단지 제품 가격과 성능뿐만 아니라 환경 보호, 노동자 인권 등 생산 과정도 소비로 바꿀 수 있지만 다수 소비자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간 우리나라는 고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산 중심, 노동자 역할은 강조됐지만 상대적으로 소비자 역할은 주목받지 못했다. 기업의 공격적인 마케팅, 많은 제품과 종류로 인한 정보 부족과 피로감은 현실적으로 소비자 주권을 제한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노동자에 가려진 소비자를 밖으로 끄집어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소비자 주권을 공론화한 옥시제품 불매운동은 새로운 한 획을 그었다. 대형마트 3사가 옥시 제품을 퇴출했고 옥션·G마켓 등 대형 온라인 쇼핑몰도 '옥시'라는 검색어를 금지 단어로 지정해 제품 퇴출을 유도했다.

하지만 성공으로 성급히 결론 내리기엔 찜찜한 부분도 있다. 순수한 소비자의 힘이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또 다른 주범이기도 한 대형마트가 책임을 면피하고자 옥시 불매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최예용 소장은 불매운동이 옥시를 타깃으로 하면서 가습기 살균제를 생산·판매한 대형유통점은 책임을 슬며시 비켜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기존 불매운동이 '사지 않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팔지도 사지도 말자'는 확장된 개념의 불매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경남에서 옥시 불매운동을 이끈 사회단체이기도 한 마창진환경운동연합 정은아 사무국장의 생각은 달랐다. 생활화학제품 불매운동의 집중도를 높이고자 가장 많은 피해를 낸 옥시 제품으로 특정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생활화학제품 전 성분 공개 요구, 전국 대형마트 앞 시위 등 전방위로 압박하며 소비자의 분노를 전달하지 않았다면 대형마트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삽화 서동진 기자.

#장면 3. 또다시 일상

"쇼핑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잖아요. 매일 반복하는 단순한 쇼핑 행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떤 물건을 얼마만큼 구입했는가는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가까이 있는 친정 엄마조차 설득하지 못하고 있어요. 소비자 운동은 일상이지만 이벤트라고 생각하는 환경이 안타깝죠."

경남에서 소비자 운동을 이끄는 곳은 경상남도소비자단체협의회(회장 이찬원·이하 경남소협)다.

거제·거창·김해·마산·양산·진주·창원·통영 YMCA, 거제·김해·마산·사천·양산·진주·진해·창원·통영 YWCA, 한국여성소비자연합 양산시지부 등 18개 단체가 회원이다. 지난 6월에는 도내 3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가습기 살균제 참사 경남네트워크가 출범했고 도내 옥시제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다. 참여 단체마저도 스스로 지역 소비자 주권 운동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소비자 교육과 알권리에 방점을 두고 캠페인을 벌이는 등 '망각'을 줄여나가는 데 일조하고 있지만 정책 제안, 성분 분석 등 역할은 다소 뒤처지고 있다. 변화를 주도하기보다 서울에 집중된 상황을 알리는 역할에 머물러있다.

경남소협 유현석 운영위원장은 소비자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업의 퇴출이 아니라 좋은 제품 생산이라고 압축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같은 문제는 기업 보상과 재발 방지 대책, 법 제·개정 등으로 이어가야 하지만 일상에서 윤리적(착한) 소비가 정착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삽화 서동진 기자.

유 위원장이 제안하는 것은 프리마켓 활성화다.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을 일방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현실에서, 소비자가 생산하고 유통에 가담함으로써 다양성을 확보해 선택권이 넓어져야 한다는 이유다.

현정 씨는 소비자 8대 알 권리만이라도 확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상 관계에서도 비밀을 만들거나 의도적으로 알려주지 않을 때는 뭔가 꺼림칙한 게 있기 때문이에요. 교육받을 권리도 알 권리와 연관이 있고 안전하고 피해 보상을 받고 의견을 반영시킬 권리 등 모든 밑바탕은 정확한 정보라고 생각해요. 생활화학제품의 전 성분 표시제 하나만이라도 이뤄낸다면 일상의 소비자 운동은 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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