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에 무너지고 자기합리화하는 지도자…희망 몽땅 불태우고 절망에 빠뜨리게 해

크르일로프는 18세기 말 러시아의 탁월한 우화 작가다. 러시아 문학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지만, 우리에게는 이솝이나 라퐁텐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적성 국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회주의에 대한 지독한 고정관념 외에도, 우화에 대한 고정관념도 만만치 않다. 우화는 교훈적이고 풍자적인 내용을 동식물 따위에 빗대어 엮은 이야기다. 그 속에는 어려움이나 슬픔을 헤쳐나가기 위한 지혜가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린아이 때나 읽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도 많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릇 러시아 사람이라면 크르일로프 우화집을 반드시 두 번 읽어야 한다. 어릴 때 한 번,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한 번 더." 크르일로프는 민중의 웃음과 지혜를 생생하게 표현해내었거니와, 황제를 비롯한 귀족을 예리한 풍자로 비판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그런 크르일로프의 우화가 갖는 힘은 당대 러시아뿐만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어 서구에서도 필독서로 꼽힐 정도다.

크르일로프의 우화 중에 <나무와 불>이라는 작품이 있다. 겨울, 나그네들이 나무 아래에 쉬면서 피우다 간 자리에 불씨가 남았다. 불씨는 점점 약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옆에 있는 나무에게 말을 건다."너는 참 비참하구나. 나뭇잎 한 장 없이 알몸이로구나! 나와 친구가 되어 준다면 너를 도와주마. 나는 태양에 지지 않는 온기를 가지고 있어 널 도울 수 있단다. 태양은 거만하게 빛나면서도 눈도 녹이지 못하지만 나는 내 주위의 눈을 녹이잖아. 봄여름처럼 겨울에도 푸르고 싶다면 나와 친구가 되어줘."

나무는 불씨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작은 불씨는 나무에게 옮겨가 큰불이 되고 모든 가지를 모두 다 태웠다. 그리고 거칠어진 불길은 숲 전체를 에워싸 몽땅 태워버렸다.

이 우화의 교훈은 명징하다. 나무에게 불은 친구가 될 수 없듯이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 우화를 들려주기 전, "자신의 탐욕이 우정을 가릴 때 당신은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조언 그대로다.

하지만 인간은 턱없이 아둔한 경향이 있어서 욕심 앞에 맥없이 무너지거나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곤 한다. 내 딸을 입학시키는 건 입학 비리가 아니라 그만큼 실력이 되기 때문이야, 재단은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일이고 나라를 위한 일이야 등등. 그러나 그런 아전인수식 합리화는 곧 사회적 지탄을 받고 심판의 대상이 된다.

윗물이 혼탁한데 아랫물이 맑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도덕적 흠결이나 무능한 지도자인 줄 모르고 뽑았다고는 하나, 최근 일어나는 정·관·재계의 비리나 맹목적 복종은 정말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 했던가.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을 찍히고 더 이상 기댈 데가 없는 사람은 제각각 살 방도를 찾기 마련이란 말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실질적으로 서민이나 국민을 위한 것은 없고 온갖 부정부패로 제 욕심 채우기에만 나선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나라에 희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무 한 그루를 태우고 숲까지 몽땅 태우게 되는 건 불문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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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해서 안 될 것에 다가가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다. 스스로를 죽이고, 동시에 가족을 함정에 빠트리게 되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썩게 만드는 일이다. 희망을 잃고 절망에 길들여진 사회는 이미 죽은 사회다. 부당한 권력이지만 시키니까 했다느니, 이리될 줄 몰랐다느니, 사생활이니까 모른 척했다느니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사족 하나, 그 와중에 손수 리스트를 만들어서 존재 증명을 해준 점에 대해서는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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