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1) 지리산…조선 선비 유람하며 자기 성찰, 우리나라 대표 이상향 '청학동'
힘든 세상 떠나 은둔의 장소로 농민 등 저항세력 거점 노릇도

지리산은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생활 문화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뻗어나간 능선만큼이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지리산에는 다양한 이미지가 투사되어 있다.

◇모든 것을 품은 어머니 = 지리산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어머니 산'이다. 지리산 산신인 성모천왕(聖母天王) 이야기는 고려 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등장한다. 성모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리산을 생각하면 왜 어머니 산인지 분명해진다. 지리산은 풍성한 흙산이라 땅이 비옥하고 계곡마다 물이 풍부하다. 지리산이 한국 산지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이유다.

같은 여성 산신 중에서도 어머니와 할머니를 구분할 수 있다. 젖이 나오느냐 즉, 물이 풍부하냐가 관건이다. 한라산 산신은 설문대할망으로 할머니 이미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생명이나 존재의 근거가 되는 모성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한라산은 화산 폭발로 형성된 탓에 지리산만큼 물이 풍부하지 않다.

지리산 천왕봉 너머로 굽이굽이 이어진 산줄기가 보인다.이 줄기에서 뻗어 내려간 골짜기마다 역사와 문화가 흐르고 있다. /유은상 기자

지리산 봉우리 중에도 할머니 이미지를 지닌 게 있다. 노고단이다. 노고(老姑)의 옛 이름은 노구(老軀)라고 추정하는데, 옛날 노고단에 할머니 신을 모신 노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노고단이 있는 지리산 서쪽은 화강암 지역으로 천왕봉이 있는 동쪽보다 상대적으로 땅이 척박하다.

◇조선 선비 성찰의 길 = 조선시대 선비들은 유달리 유산기(遊山記)를 많이 남겼다. 일종의 산행 기행문이다. 고려 중엽부터 드문드문 기록이 있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선비들의 유람 등산이 시작되었다. 지리산 유산기를 남긴 선비는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의 글을 통해 당시 지리산의 기후, 지형, 생태나 주민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이들 선비는 지리산에서 경치 구경이나 하며 노닌 게 아니다. 산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봤다. 지리산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인지지락(仁智之樂)'이란 표현이 있다. '산을 보고 물을 보면서 그 본원을 생각하고, 다시 자신에게 돌이켜 본성의 인(仁)과 지(智)를 생각'하는 조선 선비의 산행 자세를 말한 것이다. 그야말로 도덕적, 인문학적으로 지리산을 바라본 것이다.

◇은둔지와 이상향 = 지리산 청학동은 한국의 이상향을 대표한다. 고려 후기 문신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에 옛 노인이 말했다는 청학동 이야기가 나온다. 겨우 사람이 통과하는 좁은 길을 지나면 갑자기 농사짓기 좋은 넓은 땅이 나오며, 속세를 등진 사람들이 살던 곳이란 내용이다. 이인로의 글 이후로 많은 이들이 청학동을 찾으려 애를 썼다. 현재로서는 쌍계사 뒤편 불일폭포 부근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인 화개·쌍계계곡 언저리의 호리병 속 같은 불일평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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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적인 이상향이 지리산에 자리 잡은 것은 지리산의 형세 때문일 테다. 지리산에는 옛날부터 많은 이들이 숨어 살았다. 신라 말 최치원이나, 고려 말의 기인 한유한 같은 이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는 이들에게 숨을 곳을 제공했다. 주변분지는 적정 규모의 공동체가 자급자족할 농사를 지을 만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리산에는 꽤 많은 '청학동'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청학동은 사회가 혼란할수록 백성 사이에 더욱 회자하였다. 힘든 세상을 떠나 평화롭게 살 유토피아로서 말이다.

◇변혁과 저항의 거점 =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불복산(不伏山), 반역산(反逆山)이다. 역사 속에서 지리산은 많은 저항세력의 거점 노릇을 했다. 17세기 이후 조선 정국이 혼란하고, 무신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실패하면서 많은 반군이 지리산으로 몸을 피했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은 전쟁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피난처로 지리산 남쪽 자락 마을들을 언급했다. 조선 말기 일어난 진주 농민항쟁이나 농민항쟁은 지리산 자락인 덕산이 거점이었다.

현대사에서 지리산은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후 주도자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 정규부대가 대거 빨치산에 합류한다. 당시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로서 지리산은 적구산(赤拘山)이란 또 하나의 별명을 얻는다. 

[참고문헌]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 최원석, 한길사, 2014

<지리산과 이상향>, 지리산권문화연구단, 선인, 2015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최석기, 돌베개, 2007

<남명학연구> 42집,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2014

<남명학연구> 46집,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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