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31) 아르수아까지 23.1㎞ 구간, 이제 걷기도 이틀 남았어요

조용한 마을 카사노바의 밤은 모기와 함께 잠을 설치며 지나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출발 준비로 분주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나와보니 완전한 칠흑입니다. 워낙 산골이다 보니 가로등도 하나 없는 데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거든요. 순례길을 걸으며 처음 만나는 비예요. 비가 오면 땅도 심하게 질고 비옷을 입고 걸으면 불편하기도 해요. 게다가 비옷을 입어도 옷과 신발이 다 젖거든요. 그러면서 어디 앉아 쉬기도 어려워서 다들 비를 겁내더라고요. 그런데 난 오늘 처음 비를 만난 거예요. 그것도 비옷을 입을까 말까 할 정도의 비였어요. 그래도 힘들게 지고 다닌 비옷이니 한 번쯤은 입어야 하겠죠? 훗~! 전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며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근데 비옷을 입으니 몹시 덥군요. 비가 오면 힘든 것 중의 하나는 비옷을 입으면 덥다는 것도 있겠네요.

아무튼, 지독하게 어두운 산길이지만 일행이 있어 든든했어요. 호젓한 산길이고 나무가 많아 해가 있을 때 걸으면 참 좋은 길일 것 같네요. 그런데 비가 와서인지 내리막은 몹시 미끄러웠어요. 조심조심 등산 스틱에 의지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점점 어둠도 걷히고 비도 그치고 있습니다.

◀ 멜리데 마을 거리에 있는 순례길 표지석. 산티아고까지 50km 남은 지점이다.

다른 친구들은 앞서가고 니나와 함께 가며 바르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쉬엄쉬엄 걸었어요. 폴란드인인 니나는 신앙심도 깊고 친절하고 씩씩한 친구예요.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또래의 아줌마끼리는 통하는 게 있었나 봐요. 서로 의지를 많이 했었고 힘이 들 때 격려를 해 주던 멋진 친구랍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이 길이 훨씬 풍성했던 것 같아요.

'폴포(Pulpo·삶은 문어 요리)'가 맛있다는 멜리데를 지나 우리는 아르수아(Arzua)로 갑니다. 아르수아 직전에 있는 마을 리바디소(Ribadiso)에 머물고 싶지만 우리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아르수아로 갑니다. 아르수아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친구들이 알베르게 앞에 가방으로 줄을 세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알베르게 문을 열려면 2시간이나 남아 있네요. 알베르게 앞에 앉아 있자니 조금이나마 더 쾌적한 사립 알베르게로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일행을 배반할 수는 없는 일, 어제 겨우 다시 만났잖아요. 에효~! 그래도 얼른 씻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멜리데 마을의 순례자 용품 가게에서.

그런데 잠시 후 와우~! 순례자들 사이에서 즉석 공연이 펼쳐지고 있네요. 일행인 듯 보이는 젊은 친구들의 공연이요~! 기타와 만돌린,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중 한 명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렇게 음악과 함께 순례길을 걷는 그들이 어찌나 멋지게 보이던지요. 가끔 아는 노래가 나오면 흥얼거리기도 하고 순례길의 매력을 또다시 느끼며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스페인의 방송국에서 나와 촬영도 하네요.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있는데 드디어 알베르게 문이 열립니다. 와~!! 너무 오래 기다려서인지 모두 환호를 합니다. 우린 일찍 와서 망정이지 침대가 56개밖에 되지 않는 작은 알베르게라서 금방 다 차버렸고 많은 순례자가 돌아가고 있네요. 그래서 스페인 친구들이 그렇게 서둘러 온 거였군요.

아담하고 예쁜 오레오(곡물저장고)가 있는 리바디소 마을 풍경.

이곳 알베르게의 세탁기는 얼마나 크던지요. 우리 일행의 옷을 다 함께 넣어 빨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것도 재밌다고 모두 하하 호호~! 씻고 스페인 친구들을 따라 골목골목을 찾아가니 순례자들이 많지 않은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이곳도 폴포 요리가 맛있다고 해서 친구들은 시키는데 니나와 나는 오세브레이로(O'cebreiro)에서 폴포에 별로 안 좋은 기억이 있어 스테이크를 주문했어요.

건배도 하고 왁자하게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와 낮잠을 잠시 자고 일어나 내일 어디까지 갈 것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날은 이틀뿐입니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고민하다 니나와 나는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일행도 그곳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이제 하루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산티아고를 5㎞ 남겨 놓은 몬테 도 고소에서 자고 가기로 했습니다. 아침 일찍 산티아고에 입성할 계획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미사에 다녀오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동네구경을 못했네요. 아쉬워라~! 아까는 날이 훤하니까 시간도 안 보고 있다가 해가 지는지도 몰랐네요. 겨우 슈퍼에만 다녀왔답니다. 자칫 했으면 낼 아침에 굶을 뻔했네요. 슈퍼에 가다가 인도네시아에서 온 글로리아를 만났는데 알베르게는 다르지만 내일 새벽 함께 출발하고 싶답니다. 글로리아도 혼자 왔기 때문에 외로운가 봐요. 낼 만나기로 약속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아까 알베르게 앞에서 노래 부르던 젊은이들이 사람들과 어울려 또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저도 노래를 들으며 상념에 잠겨봅니다.

아르수아 마을 알베르게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즉석 연주를 하는 순례자들.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순례길에서 난 무엇을 얻었을까요?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또한, 뭔가 초조하기도 하고요. 이런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후련함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걸 뭘까요? 새벽에 걷느라 어둠 속에 놓쳐버린 풍경이 아쉽고 언어가 자유롭지 못해 나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날짜를 정해 놓고 너무 서둘러 걷느라 머물고 싶은 곳에서 머물지 못했던 것이 아쉽고 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 같아 아쉽고 특히 이 길이 끝나간다는 것이 더욱 아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데 낮잠도 잔 데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오늘은 더욱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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