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재앙

겨울이 머뭇거리는 사이 자객처럼 스며든 재앙, 오늘 아침 공기오염 지수는 473이다. 일주일 내내 주홍글씨였던 하늘은 아예 무채색으로 굳어버렸다. 차라리 미친 비바람이 낫다. 굳게 닫힌 하늘을 보느니 미친 듯이 사선을 그어대는 채찍에 맞는 게 낫다. 모든 기억이 씻기고 날아가 버린 뒤에 오는 공허함, 그것은 새 날을 기다리는 평안이다, 지금은 빈손으로 서있는 나목이 부럽다.

21세기 지구촌의 주인이 될 동북아시아가 시험에 들었다. 일본은 지진, 중국은 스모그, 한국은 핵 위협에 떨고 있다. 그나마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중국과 한국은 지은 죄가 덜한 셈이다. 기후 변화는 지구촌 전체의 재앙이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가뭄과 홍수로 가난한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시(詩)의 텃밭이던 계절의 경계가 무너지고 천국을 닮은 남쪽 바다 섬들이 하나 둘 가라앉고 있다.

작년 겨울 한국은 엘니뇨의 덕을 봤다. 해마다 겨울이면 시베리아 북서풍을 타고 황해를 건너오던 스모그가 북태평양 수온 상승으로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고 북쪽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북경은 북쪽에 옌산산맥(燕山山脈), 서쪽은 예산포(野三坡) 등 1000m가 넘는 산에 가로막혀 있다. 겨울인데도 남동풍이 밀어 닥치자 화북평원의 공업지역에서 내뿜는 석탄 가루가 북경을 독안에 든 쥐로 만들어버렸다. 적벽에서 조조를 괴롭혔던 제갈공명의 남동풍이 또다시 조조의 나라에 재앙을 불러왔다.

이런 재앙을 마주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태도는 놀랍다. 강력한 국가적 통제 앞에 개인 불편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절 마당에 피우던 향도, 명절과 결혼식 때 터지던 폭죽도, 길 가에 난장을 벌이던 양꼬치 구이도 다 사라졌다. 자가용 2부제를 하는 대신 시내버스는 무조건 공짜다. 종교 활동, 전통문화, 이동권까지 통제를 받아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나라가 하는 일이 개인의 편의보다 우선이니까. 그것이 궁극적으로 전체 인민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서도 사회주의 경제 대국이 있어 세계 경제가 이 정도라도 지탱된다는 주장에 공감이 간다.

공기 오염으로 악명 높은 허베이(河北)의 하늘도 원래는 파란색이었다. 최근 10년 이래 급격한 경제 성장의 대가로 하늘색이 점점 팔로군 군복 색깔로 변했다. 낮에는 잿빛 캔버스에 누런 동전 하나 박혀 있고 밤에는 슬픈 달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허베이의 하늘은 슬프다. 물보다 흔한 게 공기다. 가장 흔한 걸 아끼지 않은 인간에게 신은 그 죄를 물어 마지막 숨통을 죄고 있는 것이다. 공기 재앙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는 자연의 경고다. 새 소리에 잠을 깨고 바다에서 퍼 올려 대숲에 걸러낸 맑은 공기에 관자놀이가 뻥 뚫리는 하루가 시작되는 명주마을의 아침이 그립다. / 김경식(시인·중국 하북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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