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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해전은 왜 거제서 일어났을까?

[아이들에게 지역 역사를 돌려주자] ② 가이드북 내용
나라의 운명 좌우한 길목 승전에 희망도 안겼지만…패전 후 백성들 고통 나날, 전쟁사 보며 평화 떠올려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6년 12월 07일 수요일

<초등학생을 위한 거제지역사 가이드북>은 거제 역사를 거제 아이들에게 일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을 다루었으며 널리 알려져 있는 경우는 새로운 시각과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전체 내용 가운데 몇몇 부분을 골라 소개한다.

거제라는 섬은 진해와 마주보며 남해로 들어오는 입구 구실을 했다. 여기를 잘 지키면 나라가 통째로 편안했지만 거제를 내어주면 남해는 물론 서해까지 외적이 휘젓고 다닐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주요 해전 대부분이 거제를 중심으로 한 해역에 몰려 있는 이유다.

책 표지.

옥포해전과 고현성 함락

거제 옥포해전은 조선 수군 최초의 승전이다. 1592년 5월 7일 옥포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벌이던 왜군을 기습해 적선 26척을 깨뜨렸다. 이순신 전승·불패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왜군이 서해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으며 조선 백성들한테 커다란 희망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조선이 연신 패배하기만 했는데 옥포에서 승전하고나서는 '앞으로는 왜군을 물리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거제 사람들은 옥포해전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1957년에 옥포만이 내려다보이는 당등산에 순수 민간의 힘으로 '옥포대승첩기념탑'을 세웠다. 6·25전쟁 직후여서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뜻을 세우고 물자와 자금을 모은 거제시민이었다.

그런데 옥포해전의 승리는 고현성 함락으로 이어진다. 타고 온 배가 대부분 불타고 나머지는 달아나버리고 보니 육지에 올라 노략질을 하던 왜군들은 도망할 길이 차단되고 말았다. 육지에 남은 왜군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계속 내륙으로 서진했다. 그 결과 거제의 중심이었던 고현성이 닷새 뒤에 함락되어 불타고 말았다. 승전보 뒤에 숨은 패전의 비보, 일반 백성들에게 전쟁은 이겨도 져도 고통스럽기만 하다는 진실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다.

해상 방위의 요충인 거제를 설명하면서 아이들 눈높이 맞게 책에 그린 삽화. /서동진 기자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

1597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이간책에 넘어가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는다. 선조는 원균에게 부산의 왜군 본진으로 진격해 싸우라고 명령한다. 통제사가 되기 전에는 원균도 부산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되고 나서 보니 무모한 줄을 알게 되었다.

부산 일대는 섬이 많은 거제와 달리 트인 바다여서 숨을 데도 없고 전선도 600척이나 되어 조선보다 4배나 많았던 것이다. 그래도 도원수 권율은 계속 싸우라고 다그쳤으며 말을 안 듣는다고 원균을 곤장으로 때리기까지 했다.

7월 14일 원균은 병사 2만과 전선 150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조선 수군은 허술했으나 일본 수군은 치밀했으며 풍랑조차 조선 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퇴하게 되었으나 돌아오는 곳곳에서 매복해 있던 왜적에게 기습을 당했다. 고난의 행군으로 지칠 대로 지친 조선 수군은 이튿날 밤 거제본섬과 칠천도 사이 칠천량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이를 노리고 바다와 육지에서 한꺼번에 쳐들어왔다. 전선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챙겨 달아난 12척밖에 남지 않았고 정예 수군 2만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제해권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두 달 뒤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이기고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이 처참하게 깨진 칠천량해전. 전쟁은 누구나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그나마 이기면 좀 덜하고 지면 더욱 처참하다고 일러주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칠천량해전 참패의 고통은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 평화를 만들고 지켜야 한다. 전쟁의 끔찍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칠천량해전은 그 지표가 되어야 마땅하다.

일본의 지배집단은 침략(대륙 진출)을 포기한 적이 없다. 1860년대 한국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제기했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제압한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외교권 박탈, 1907년 한일신협약 군대 해산, 1910년 한일합병 경술국치를 잇달아 강요했다. 1945년 패망한 뒤에도 이어져 지금 아베 수상이 일본을 전쟁할 권리가 있는 나라, 다른 나라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칠천량패전은 이런 현실을 엄정하게 돌아보게 하는 역사의 거울이다.

외롭고 처절한 유배의 땅

<조선왕조실록>에는 유배 관련 기사가 5860건 정도 나온다. 첫째가 제주도로 81번, 둘째가 거제도로 80번이다. 유배온 사람 숫자는 <고려사>를 포함할 경우 제주도는 300명으로 적고 거제도가 500명으로 많다. 유배는 지금 감옥살이 정도라 할 수 있다.

요즘은 구속되면 의식주를 모두 나라가 제공하지만 옛날에는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이렇게 유배를 오는 인물들은 많은 경우 정신적·학문적 소양이 뛰어나 지역사회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거제에서 처음으로 유학이 일어난 시기는 정황이라는 선비가 유배와 있던 기간(1548~60년)과 겹친다. 거제 사람들이 새로운 문물을 맛보고 새로운 학문을 익히도록 만든 것이 이 유배라는 형벌이었다.

거제에는 서원이 딱 하나뿐인데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아 기리는 반곡서원이다. 뛰어난 학자였던 송시열은 1679년부터 1년 남짓 거제에 귀양살러 와 있으면서 지역 선비들을 즐겨 가르쳤다.

주민이 쌓은 거제 교육

초등학교 본관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경우는 전국적으로 드물다. 거제면 거제초등학교는 내년이면 개교한 지 110년이 되는 오래된 학교다.

하지만 거제초교가 특별한 이유는 이런 역사 말고 다른 데에 또 있다. 거제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등록문화재에 이름을 올린 거제초등학교 본관. /김훤주 기자

전쟁통에 사라진 학교 건물을 6·25전쟁이 끝나자 짓기 시작해 1956년 2월 2층 크기에 교실 16개로 준공했다. 등록문화재 제356호인 본관 건물인데 화강암을 길쭉한 네모꼴로 다듬어 쌓고 붉은 벽돌을 섞어 석조건물의 장중함이 느껴지도록 하고 현관은 서양식으로 꾸몄다.

당시는 초근목피조차 없어 못 먹을 정도였고 그래서 교실 따위는 나무 판자로 대충 지어도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자식들을 위하여 바위를 떼어와 다듬었으며 붉은 벽돌을 굽고 쌓는 데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알고 보면 경건한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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