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당뇨 때문에 미처 키가 자라지 못한 한 여성이 주변의 부축을 받아서 무대에 올랐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가 조명 속에 홀로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시를 읽기 시작했다.

'소아당뇨병을 앓은 지 어느덧 36년. 그 합병증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지도 벌써 17년/길다고 생각하면 긴 시간이었고/짧다고 생각하면 참 짧은 시간//나 어렸을 때 봉숭아 꽃잎 찧어서/ 손톱에 예쁘게 수놓았던/싱그러운 그 기억도 가물가물/스무 살 성년의 날/그 누구에게 받았던 스무 송이 장미 빛깔도 가물가물/항상 건강관리를 잘 하셔서/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던/아빠의 얼굴도 가물가물/물론 이제는 팔순을 지나/세월의 연륜이 쌓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항상 이 아픈 막내딸 걱정 때문에/흰 머리 늘었다는데/그 말을 듣는 순간/나의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네//보이지 않아서 가물가물/많은 시간이 흘러서 가물가물/그립고 아름답던 시간도/아프고 괴로웠던 추억도/이제는 머릿속 희뿌연 연기처럼 가물가물//'

시가 낭송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에 유난히 굵은 눈물을 흘리는 한 사람, 희끗한 머리의 노신사는 바로 이 시에 등장한 아픈 막내딸 걱정에 노심초사했던 아버지셨다. 비록 볼 수 없지만 아버지 앞에서 그 시를 낭송한 시각장애인 김미화 씨도, 그리고 그 시를 듣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도 오롯이 감동이 되어서 사람들의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지난 11월 19일 오후 3시, 김해문화의전당 소극장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창작시 음악 축제는 감동과 보람의 무대였다. 시각장애인들과 독서·글쓰기 수업을 진행한 지 4년, 김해소리작은도서관의 수강생들에게 믿지 못할 만큼 멋진 기회가 찾아왔다. 경남문예진흥원과 김해문화의전당, 경남점자정보도서관이 힘을 모아 수강생의 글 중에서 좋은 작품을 가려 노래로 만들어 발표하자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리고 1년여의 시간동안 수차례 회의와 작곡, 가수 선정, 행사기획 등 준비를 거쳐 이날 드디어 무대에서 발표하게 된 것이다.

감동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창 연주가 계속되던 무대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 관객 사이에서 순간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런데 그런 어둠 속을 뚫고 기타와 하모니카가 어우러진 합주가 시작되었다. 조명은 노래의 1절 연주가 끝나도록 들어오지 않았지만 어둠 속 연주는 계속되었다. 이윽고 서서히 밝아온 조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시각장애인 하모니카와 기타 합주팀 하모입살리카였다. 고장 난 줄 알았던 조명이 사실은 시각장애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게 하려는 연출팀의 의도였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쓴 시, 그 시로 만든 감동적인 노래들, 그리고 어둠 속의 연주, 이 감동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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