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시간만이 존재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은 왕과 그 일족의 시간을 거듭 기억하고 외울 뿐, 세상은 두려운 늪과 같은 것이었다. 그 곳에 틈과 길이 생기고, 예사사람들의 시간이 끼여들기 시작한 때가 이른바 근대다. 그리고 그것을 불러일으킨 가장 중요한 요소는 놀랍게도 대량 인쇄기술이었다.
매체 변화로 말미암아 고인 시간의 늪인 신화에서부터 벗어나 죽 벋은 시간의 다발, 곧 역사는 내닫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화·민주주의는 그것의 핵심 동력이었고, 도시는 그 맏이였다. 죽 벋은 기찻길을 달리는 커다란 기차와 그 축을 따라 몸을 불린 도시는 근대인의 가슴을 벅차게 했던 풍경이었다.
그러한 근대 기획에는 다른 시간이 끼여들 자리가 없었다. 앞서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 제국들은 딴 나라로 들어가, 그들의 기록을 지우고, 그들의 공간 위에다 자신의 시간을 뒤덮었다. 서구화라는 단선적·일방향적 시간만 허락되었던 셈이다. 그들의 시간표대로 열차에 오르지 않는 집단은 야만이 되고, 악이 되었다. 나와 다른 삶의 차이는 차별로 증폭되었고, 친소가 선악의 잣대로 굳어졌다. 지나간 근대 200년 동안 세상은 서구인이 산업기차를 타고 창밖으로 둘러보는 식민지거나 새 경작지였을 뿐이다. 고유문화는 망가지고, 환하고 높은 시계탑처럼 제국의 통제만이 빛났다.
그리고 이제 화려했던 근대의 시간은 신장개업을 준비하고 있다. 월드와이드웹이라는 무기와 정보화라는 옷으로 산뜻하게 갈아입고, 새로운 전자 탄환열차를 마련했다. 그 속에서 우리 사회 또한 유례 없이 번잡스런 문화접변기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와 전근대에다 탈근대까지 뒤섞인 셈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인습의 시간 열차는 멈출 생각이 없다. 공공적이라는 명분 아래 어마어마한 나랏돈 잔치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생활 정치는 간 데 없이 번지르한 패거리 정치만이 여전히 사람들 머리 위에서 소란을 떤다. 한 번 쥔 이득은 어떤 변화 앞에서도 내놓을 수가 없다는 뜻이겠다.
지역은 지역대로 자치제도를 볼모로 절차 행정·과업 행정에 바쁘다. 지역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한 축인 지역언론 또한 그에 맞장구치면서 새로운 정경유착의 지역화·토착화 모델 완성에 기꺼이 몸바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의 화려했던 옛날과 오늘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도 잊지 않는다.
문화니 역사니 이름을 내세우며, 수상한 건물을 올리고, 두터운 기록물을 뿌리며, 지나간 시간을 힘껏 화석화한다. 보도 사진과 영화, 텔레비전의 다양한 영상 기록까지 끌어들여 견딜만한 정도로 간추려지고 순화된 시간의 모자이크를 화려하게 보여주며 객관성을 웅변한다.
새로운 시간이 온다. 낮과 밤 없이 24시간 무서운 속도로 삶을 등질화하는 전자열차의 세상이 온다. 일어난 사건과 그것을 쓴 역사라는 이원적 거리를 빌어 교묘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인쇄매체의 이데올로기적·사회적 관리장치가 끼여들기 힘든 세상이다. 다른 곳의 사건이 바로 현존이 되고, 그것이 이내 신화로 굳어버리는 디지털사회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빙하기로 쫓겨난 유목민처럼 야만의 풀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남성적·국가적·획일화된 공적·이성적 규칙보다 여성적·지역적·다원화된 사적·생태적 친밀감으로 삶의 자리를 옮긴 정보인간으로 거듭날 것인가·
새로운 천년 첫 해라는 화려한 수사를 이끌고 2000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지 한 해가 흘렀다. 그러나 이 한 해 동안 우리 사회의 변화는 느리고 더뎠다. 변혁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깨닫는 해였다.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기계의 시간과는 무관하게 먼 우주 끝에서부터 몇 만 년을 찬찬히 걸어와 이제야 우리의 하늘에 이른 별빛 가족도 있다.
의령 신반 골짝 살얼음 녹는 도랑가에는 막 핀 고들빼기의 잔털같이 여린 시간도 있다. 근대 산업인간이 지나온 시간의 길 바깥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또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12월의 하늘 아래 땅 위에 나는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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