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사태'박 대통령 대국민 담화 발언…억울한 심정 잘못 표현 '비꼰 패러디'유행

윤동주의 '서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빼앗긴 나라의 국민으로서 시가 쉽게 쓰이는 것조차 부끄러웠던 윤동주의 마음은 광복 후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팠다. 일제에 부역한 이들은 물론이고 한목숨 부지하고자 엎드려 살았던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에 일침을 가했다. 일제 앞잡이들은 오히려 큰소리치며 우익인사로 탈바꿈한 놈이 많긴 하다. 아무튼,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 아니었던가.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마디 하면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하다"고 말한 뒤 이 말을 따라하는 게 유행이 되었다. 자괴감(自愧感)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대통령 말은 요즘 일어나는 일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괴롭다"는 말이다. 대통령의 처지가 되어 본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느라 했는데 이런저런 자잘한 문제를 가지고 촛불시위를 하고 하야하라고 하고 탄핵하겠다고 하니 좀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괴로워 미칠 지경이다.'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죄를 지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의 담화를 들으면서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억울하다'가 아닐까 싶었다. 그다음은 '괴롭다'였을 것이다. 실제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부끄럽다'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면 일이 이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의 이 말을 따라하는 국민이나 언론이 꽤 많다. 초등학생도 따라하고 연예인들도 따라하게 됐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자괴감'이라는 말을 잘못 알고 쓰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대로 자괴감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다. 그런데도 부끄러운 상황이 아니라 화나고, 억울하고, 짜증 나고, 당황이 되고, 황당한 경우에도 '자괴감'이라는 말을 갖다 쓰는 것 같다. 자괴감이라는 말에서 '괴'를 '괴롭다'는 뜻으로 잘못 안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몇 가지 보기를 찾아본다.

-수능 끝낸 고3들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느껴" (경향신문)

-'개콘-민상토론' 유민상 "내가 이러려고 개그맨됐나 자괴감" 폭소 (뉴스엔)

-크라잉넛 "이러려고 말 달렸나 자괴감 들어" (한겨레)

박 대통령 '자괴감' 발언을 패러디한 한겨레·경향신문 기사 제목.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끝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부정적 방법으로 명문 사학 이화여대에 입학했다는 것을 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화나고 억울할 것이다.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때는 "이러려고 공부했나, 분노 치밀어"라고 말하는 게 맞다. '말 달리자'라는 노래로 유명한 크라잉넛도 마찬가지로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일 것이다. 개그맨 유민상은 이런 경우 "참 웃긴다"고 말함 직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자괴감'과 윤동주가 말한 '부끄러움'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것이다.

/이우기(글 쓰는 삶, 생각하는 삶 blog.daum.net/yiwoo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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