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29) 사리아∼포르토마린 23.9㎞

더운 날씨에 코 고는 소리에, 저도 그랬지만 다들 정말 자기가 어려웠나 봐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어떤 사람은 매트리스를 아래층에 가져가서 자고 올라오기도 하네요. 오늘은 다리가 아프니 배낭을 부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일어나지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어요. 보통 다른 알베르게는 짐을 놔두고 가면 알아서 부쳐주는데 이 알베르게는 6시에 직접 부치고 가야 한답니다. 하는 수 없이 배낭을 지고 출발했죠.

밖으로 나오면 다른 순례자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는 거예요. 마을이 끝나가는 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누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리아를 쳐다보며 30분 넘게 기다리니 겨우 한 명이 오고 있네요. 깜깜한 길을 랜턴에 의지한 채 앞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걸었습니다.

오다 보니 길이 평탄해서 어제 일행이 묵는다던 곤자르까지 더 왔어도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럿이 같이 다니다 보니 혼자이길 원했었는데 오늘은 정말 혼자 걷는 이 길이 아주 좋았어요. 어둠이 걷히자 너무나 평화로운 스페인의 농촌풍경과 아직 남아 있던 구름이 잘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연출하네요.

포르토마린으로 향하는 길에 본 백파이프 연주자.

어디서 아름다운 백파이프 소리가 납니다. 조금 걸어가니 순례길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앞에서 여유롭게 감상을 하다가 1유로를 주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제 마사지를 열심히 한 덕인지 다리가 더 아파지지 않는 것 같고 배낭을 지고 걷는데도 별 무리가 없네요. 정말 다행이죠?

며칠 전부터 순례길에 어린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사람이 걷고 있어요.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100㎞를 걸으면 순례자증을 준다고 해요. 처음부터 다 걷고도 이 구간을 걷지 않으면 순례자증을 안 준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이러니한 일인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이 구간에만 순례자(?)들이 몰리게 되어 있어서 숙소도 붐비고 길도 붐빈다고 합니다.

길도 평탄하고 돌담도 많고 풍경도 좋고 날씨도 좋고 오늘은 걷기가 참 수월합니다. 11시도 안 되어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입성! 강을 끼고 높은 곳에 있는 도시가 정겹게 반겨 줍니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이 나와서 물을 나눠주는 봉사도 하고 있었고요.

포르토마린 마을 광장에서 공연을 하며 춤을 추는 학생들.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에 가니 내가 제일 먼저 도착을 했네요. 일단 가방으로 줄을 세워놓고 동네를 둘러보다가 가방에 쌀이 남아 있는 것이 생각났어요.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은 터라 사립 알베르게로 가기로 했지요. 이곳 공립 알베르게엔 주방이 없거든요.

골라서 찾아간 알베르게는 깨끗하고 맘에 들었어요. 이곳도 제가 일등이네요. 얼른 씻고 장을 보러 나갔죠. 감잣국을 끓이고 오이를 무치고 계란말이를 해서 맥주와 함께 혼자 근사한 점심을 먹었어요. 여유롭게 쉬고 있는데 바로 옆 침대의 이탈리아 부부가 둘이 끌어안고 히히덕거리고 가관입니다. 그 좁은 침대에서요. 조금 낮잠을 잘까 하다가 '에효!' 안 되겠다 싶어 시내구경을 나갔어요.

지대가 높은 포르토마린 마을 입구 가파른 계단 앞에서 박미희 씨.

오늘 날씨는 완전 가을 같아요. 햇볕이 조금 따갑긴 해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더없이 좋습니다. 그런데 길이 다 비탈길이라서 걷는 게 좀 힘이 듭니다. 걷다가 동네 바르에 앉아 있는데 이 시간이 너무 감사하게 다가오더군요. 앞으로 또 내 일생에 이런 날이 올까요? 오로지 나만의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 먹고 잠자고 씻고 걷고, 단순하지만 정말 풍요로운 시간이에요. 이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조금은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최선을 다해 느끼고 즐기자고 혼자 다짐을 해 봅니다. 지금 스페인의 작은 도시에는 제가 젤 좋아하는 살랑 바람이 불고 있어요. 이 분위기 정말 그리울 것 같아요.

광장으로 나오니 스페인 학생들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아까 오다가 만났던 친구들인데 어떤 학교에서 단체로 순례길 체험을 하러 왔나 봐요. 기다리고 있노라니 며칠 전에 폰페라다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프랑스 여인 둘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도 눈에 띄고 프랑스 할아버지, 러시아 부자 등 아는 얼굴들이 많이 있어 더욱 기분이 좋아요. 인도네시아에서 온 클라우디아와 함께 다니던 멕시코인 후안과도 인사를 나누었죠.

포르토마린 마을 광장에서 공연을 하며 춤을 추는 학생들.

공연이 시작되었고 나와서 노래하고 싶은 사람을 불러냈는데 프랑스 여인 중 하나가 나가서 노래를 불렀고요. (영 아니었어요. ㅋ) 멕시코인 후안이 나가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데 현란한 기타솜씨 하며 가창력까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몇 번의 앙코르를 받았답니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추억의 마카레나 춤도 추고 아주 신나는 한마당이 펼쳐졌습니다. 나도 질 수 없지요. 함께 손뼉치고 춤추며 즐기고 있는데 아는 사람들이 엄지를 올리며 흥을 돋워줍니다. 아직 고등학생들인데 선생님 앞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스스럼없이 춤추고 진한 스킨십이 좀 놀랍기도 했지만 이곳 문화라니요. 공연이 끝나고 후안에게 가수냐고 물어보니 정말 멕시코 가수랍니다. 어쩐지~!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주니 함께 다니던 클라우디아도 뿌듯한가 봐요.

광장 바로 옆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까 공연했던 팀이 다 성당으로 가서 첼로, 바이올린, 기타를 치며 함께 미사를 하는데 그 소리의 아름다움이 감동 그 자체였어요.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가 봐요. 미사 후 신부님들이 안수를 해 주시는데 유난히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거든요. 생각지 않은 큰 선물을 받고 감동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어요.

아까 남았던 밥으로 저녁을 먹고 물을 사러 갔는데 오잉~! 벌써 시에스타 시간이라 큰 슈퍼도 문을 닫았네요. 이 사람들은 정말 삶을 즐기고 산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순례자나 관광객을 위해서 문을 좀 더 열 법도 한데 철저하기도 한 거 있죠. 에구~!! 아까 그 이탈리아 부부는 금슬도 좋네요. 뭐가 그리 좋은지 2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한 침대에서 아직도 계속 낄낄거리고 있어요. '여보쇼! 여긴 많은 사람이 함께 묵는 알베르게라고요! 쫌!' 요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귀마개를 꼭꼭 집어넣고 잠을 청해 봅니다.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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