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때 우연히 배운 피아노, 밤마다 세탁소서 '작은 콘서트'…몸도 마음도 건강한 삶 즐겨

올해 1월의 어느 날. 제법 추웠던 날로 기억한다. 해가 지고 요란한 네온사인과 음악으로 떠들썩했던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치안센터 부근을 걷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니 '세탁 동일사'였다. '2-3005' 전화번호가 그 세월을 알려주고 있었고, 세탁소 안 한편에서 머리가 희끗한 한 노신사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의 길목에서 그곳을 찾았다. 여전히 노신사는 세탁소 일을 마치고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배명규 씨에게 찾아온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미소를 지어 보인다.

먼저 배 할아버지의 연세를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나이로 일흔여덟. 세탁소 내에는 빨랫감이 잔뜩 쌓여 있었다.

배 할아버지는 스무 살 무렵에 우연히 피아노를 배웠다. 정식으로 교육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 중 잠깐 마산에 머물렀던 박형태 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웠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는 배 할아버지. 당시 음악을 접할 기회나 있었을까 의구심이 일었다.

살면서 악기 하나쯤은 배우라고 말하는 배명규 할아버지. 그는 매일 밤 세탁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김희곤 기자

"6·25전쟁을 거치고 정말 살기 힘든 시대였지요. 부친께서 양품점 사업을 했는데, 일주일에 꼭 한 번씩은 일본을 오갈 정도로 수완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할 수 있었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때부터 배 할아버지와 피아노는 친구가 됐다. 친구는 할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다.

배 할아버지는 한때 지금 세탁소 자리에 피아노 레슨실을 열었다. 피아노 4대를 들여놨었고 80여 명씩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이웃집에서 자취를 하며 당시 제일은행을 다니던 동갑내기 여성도 피아노를 배우러 왔다. 그녀는 지금의 아내다. 자세한 이야기를 묻자 배 할아버지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아낀다. 그러자 할머니는 "저 양반이 먼저 그랬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시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랜드 피아노도 방안에 그대로 있었다.

한번은 진해에 주둔하던 미군이 피아노를 가르쳐 달라며 찾아왔다. 배 할아버지는 "가르쳐 줄 테니 대신 우리 아들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덕분이었을까. 큰아들은 현재 하버드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있다.

배 할아버지는 결혼을 하고, 부친이 하던 세탁소를 이어 받았다. 배 할아버지는 "한때 세탁은 마산 시내에서 최고였지"라며 자부심이 강했다. 40년 가까이 세탁소를 하면서 자식들 다 공부시키고 이제는 그만둘 때도 됐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며 간판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는 말에서 여전히 애정이 느껴졌다. 또 근처뿐만 아니라 함안, 의령 등에서도 빨랫감을 보내는 단골도 많다고 했다.

사실 배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보다 연주를 듣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눈이 잘 안보여서 힘들다"면서도 끊임없이 연주를 이어갔다. 갑자기 한 행인이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신도 취미로 피아노를 친다는 행인은 살짝 취기가 오른 것 같았지만 한참을 같이 연주를 들었다.

일흔여덟의 나이에 이렇게 정정한 비결을 물었다. 우선 술·담배를 하지 않았다. 10년여 전 큰며느리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역시 가장 큰 비결은 피아노다.

배 할아버지는 "꼭 살면서 악기 하나쯤은 배우세요. 피아노를 하니까 첫째로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잖아요? 그래서인지 몸이 건강해요. 둘째로 악보에 집중하니까 정신 또한 건강해집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여유로워져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옆에 있던 할머니도 거들었다. "아침마다 같이 회원천에서 산책하고 돌아오면 피아노에 앉아 노래 한 곡 부르고 하는데,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이후에도 '작은 콘서트'는 한참 이어졌다. 배 할아버지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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