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28) 갈리시아 지나 산티아고까지
어느덧 여정 막바지 이르러 다리 부상으로 일행과 떨어져…혼자 지내는 밤 외로움 더해

오세브레이로에서 트리야카스텔라까지 20.7㎞

오늘은 안개가 자욱합니다. 이곳은 안개로 유명한 지역이라네요. 조금 길을 가다 어린 아가씨 한 명을 만나 같이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10명이나 되어 괜찮지만 이 안개 낀 새벽이 무섭지 않은지 대단해 보였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공부를 한다는 러시아 아가씨 케이트였습니다. 그녀도 우리와 함께 걸으니 든든한가 봐요. 순례자상으로 유명한 산로케 고개(Alto San Roque)도 안개에 덮여 있습니다. 시야가 가려 있어 좀 답답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괜찮네요. 이 길에서 아직 비는 만나지 않았는데 한 번쯤 비가 오는 길을 걸어보고 싶은 건 배부른 소리일까요? 사실 날씨가 매일 쾌청해서 다행이었어요. 비가 오면 땅이 심하게 질퍽거리고 비가 오락가락하면 우비를 벗었다 입었다 몇 배 더 힘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곧 안개가 걷히고 해가 배시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구름이 걷히자 멋진 풍경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수많은 소가 곁으로 지나가기도 하고요. 쇠똥을 피하느라 걷기는 힘이 들었지만 피레네 다음으로 멋지게 펼쳐지는 풍경이 모든 것을 잊게 합니다.

새벽 산로케 고개의 순례자상.

이제 내리막, 저 밑에 트리야카스텔라(Triacastela)가 보이는데 며칠 전부터 살짝 아프던 다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르막일 때는 괜찮았었는데 말이죠.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요. 일행에게는 먼저 가라고 하고 주선이와 둘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아주 힘이 들었어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모두 걱정을 해 줍니다. 이렇게 왔는데도 오전 11시가 안 되었어요. 처음에 무리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되었지만 이제 어쩌겠어요. 오후 1시까지 알베르게 문 열기를 기다리며 알베르게 앞 바르(bar)에서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어요. 숙소로 돌아오는데 프랭크(순례 초반부터 자주 만나는 미국인)가 아까 우리가 내려온 산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같은 알베르게, 참 인연이에요. 약속도 하지 않았고 알베르게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주 만나네요. 이 길을 걸으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부럽던지요. 저는 그런 달란트가 없으니 이 멋진 경험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일기로 남길 뿐이에요.

트리야카스텔라로 가는 순례길 풍경.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데 왠지 자꾸 슬퍼집니다. 왜냐구요? 이제 곧 이 길이 끝나잖아요. 이 길을 떠나야 하잖아요. 사람들은 순례길을 세 단계로 나누어 말을 하지요. 나바라와 라 리오하지역 초반 삼분의 일을 고통의 길,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메세타 지역을 명상의 길, 내일부터 걷게 되는 갈리시아를 지나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을 깨달음의 길이라고요. 아직은 이 길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왜 이 길을 걸은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못 잊어 하고 또다시 걷는지는 좀 알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이제 나머지 길을 걸으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리아 마을 표지판.

트리야카스텔라에서 사리아까지 18.6㎞

그동안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어요. 그동안은 조금 아프다가도 자고 나면 괜찮은데 오늘은 다리가 나아지지 않는 거에요. 같이 출발을 해서 걷다가 일행이 나 때문에 늦어지는 것 같아 먼저 가라고 했어요. 스페인 친구 차로가 중도에 포기하고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 걱정이 되더라고요. 친구들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뒤돌아보며 앞서 가네요. 그때부터 또 눈물이 나는 거예요. 실은 며칠 전부터 혼자이기를 은근히 바랐던 일인데 말이죠. 다리는 아프지, 친한 사람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프더라고요. 어쩌면 못 만날 수도 있잖아요.

훌쩍거리며 가고 있는데 우리 일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래도 속도를 내기는 어려웠어요. 앞으로 기다리지 말라고 하고 다시 헤어져 좀 편한 도로를 따라 내려왔어요. 이 길엔 순례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아요. 결국 길을 잃어버렸죠. 카미노에서 약간 벗어난 길이다 보니 표지가 없어진 거예요. 어느 마을로 들어갔는데 물어볼 사람도 보이지 않고 스마트폰에 길 찾는 앱도 제대로 작동이 안 돼요. 그런데 크게 걱정은 안 되더라고요. 혼자인데도 이젠 간이 좀 커졌나 봐요. 길가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보였어요. 그분이 잘 가르쳐 주셔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었답니다.

순례자 숙소에 널린 순례자들의 빨래.

천천히 쉬엄쉬엄 사리아(Sarria)까지 왔어요. 원래는 일행들과 바르바델로(Barbadelo)까지 가기로 했는데 더 걸으면 무리일 것 같아 사리아에서 쉬어가기로 했답니다. 혼자 걸으면 생각을 더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생각이고 뭐고 아픈 다리에만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며칠을 일행들과 우르르 다니다 혼자가 되니 하루도 되지 않아 외로움이 엄습을 합니다. 바르바델로까지 억지로 라도 갈 걸 후회가 되었지요. 이 알베르게에 주방이 보이기에 아픈 다리를 끌고 슈퍼에 갔습니다. 마침 배낭에 쌀이 조금 남아있어 밥을 해먹으려고요. 한국 음식을 먹으면 외로움이 가실까요?

우익, 요리하려고 보니 가스는 있는데 조리기구가 없는 겁니다! 알고 보니 갈리시아지역에서는 알베르게 주방도구를 모두 없앴답니다.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데 저는 어쩌라구요. 씁쓸히 빵을 먹고 있는데 프랑스에서 온 파리에앙느 할아버지가 주방에 왔습니다. 대충 짐작하기로 오래전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를 순례한 적이 있다는 것 같은데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작은 코펠을 가지고 다니며 식사를 직접 해먹는다더군요. 오늘도 스파게티를 해먹는데 그 손놀림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녜요. 저보고도 먹어보라네요. 전 금방 식사를 했다 하니 달걀 삶은 걸 나누어 주십니다. 저도 그 코펠을 빌려 감자를 삶아 나눠 드렸지요. 식사 후 미사에 갔는데 거기서 폴란드모자와 인도네시아에서 혼자 온 클라우디아를 만났어요. 아는 사람이 너무 없어 외로웠는데 다행이죠. 폴란드 모자는 같은 알베르게라서 숙소로 와서 같이 과일을 나누어 먹고 산책하러 가고 전 다리 마사지를 했어요. 얼른 나아야 할 텐데요.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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