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편집자가 다석의 생애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차후에 쓰기로 한다. 이번에는 글쓴이가 다석을 처음 접했던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을 공부해보기로 하자.

당나라 현장스님이 번역한 한문 원문과 유영모의 우리말 옮김을 대조하면서 반야심경의 껍질이라도 훑어볼 참이다. 물론 다석 제자 박영호 선생의 풀이가 이 글을 쓰는 데 큰 사다리가 될 것이다.

차례는 한글음, 한문원문, 다석의 우리말 옮김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 재계 건넘 슬기 맘줄 :

'반야'와 '바라밀다'는 인도 산스크리트어(梵語) 원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산스크리트어 음을 소리 나는 대로 한자음으로 옮긴 음역(音譯)이다. 범어 'Pranjna'를 음역한 반야는 '지혜', '밝음'의 뜻인데 다석은 이를 우리말 '슬기'로 옮겼다. '재계'는 저쪽이란 뜻이다. 흔히 차안과 피안이라 하여 불교에서는 피안을 서방정토, 극락세계라 부르기도 한다. 범어 paramita의 음역인 바라밀다는 차안을 건너 피안에 이른다는 '도피안(到彼岸)'이라 의역한다. 다시 말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슬기로운 마음의 줄 혹은 실타래라면 엇비슷해질 것이다. 경(經)은 실 사(絲)변이 붙어 있듯이 실비가 내리듯 멈추지 않고 내려오는 슬기의 말씀을 담은 큰 그릇이다.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 구경지를 거닐다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 있다시 보이 보살 :

관자재보살은 우리에게 관세음보살로 더 익숙하다. 불경은 중국에서 많은 대각들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한국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금강경>은 후진(後秦)의 서역승려인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잘 번역하여 구마라습의 저본이 유통되고 있다. 구마라습은 <반야심경> 번역에서 관자재보살 대신 관세음보살로 옮겼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시 가운데서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이란 구절의 '지음(知音)'이 말하듯, 세상의 소리를 관찰하는 보살이라는 의미로 '관세음(觀世音)'이라 하였고 현장스님은 스스로 내재한 곳을 들여다본다는 의미의 '관자재(觀自在)'로 의역한 듯하다.

다석이 '있다시 보이'라고 옮긴 정확한 뜻은 아직 모르겠다. '다석어록'에는 "나는 무엇인가 나라는 것을 찾으려면 나 속에 들어가야 한다. 가까운 이웃 친구 친척 거기서 나를 찾을 수 없다. 오직 나 안에서 나를 찾을 도리밖에 없다. 나라는 것은 마침내 있다고 하고 싶다. 나는 있다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데 확답은 못한다"고 했다.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인 듯하며 '관자재'의 의미와 통한다.

박영호 선생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벽암록>을 인용했다. "선사 운암(雲巖)과 도오(道吾)가 서로 물었다. 운암이 '천수천안(千手千眼)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눈과 손을 어디다 쓸까요?' 라고 묻자 도오가 '한밤중에 자다가 베개를 놓쳤을 때 더듬어 찾는 것과 같지' 라고 답했다. 운암이 '잘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도오가 다시 '그래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하고 되물었다. 운암은 대답하기를 '온몸에 두루 손과 눈이 있다는 거지요' 라고 대답했다. 도오는 '네 말이 제법 그럴듯하다만 아직 안되겠다.'고 말했다. 운암이 다시 묻기를 '그럼 사형은 어떻다는 겁니까.' 그러자 도오는 '온몸이 그대로 손과 눈이지'라고 답했다."

보살은 범어 보디(진리) 사트바(사람)를 보리살타로 음역한 것이니 진인(眞人), 참사람이란 뜻이다.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行深 般若波羅蜜多時- 반야바라밀다에 깊이 갔을 적에 :

피안의 세계에 깊이 갔다는 것은 깨달음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렀다는 말인데,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의 경지를 거닐어 깊이 가다(行深)라고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때(時)

520147_396990_0929.jpg

피아가 사라진 곳에서 쓴 걸림이 있을 리가 만무함

조견 오온개공(照見 五蘊皆空) - 다섯 꾸럼이 다 빔을 비춰보고 :

온(蘊)은 쌓인다는 뜻이다. 부처는 인간의 사유와 인식 과정을 다섯 개의 쌓임(五蘊)으로 설명했다.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다. 인간의 육신인 이 몸뚱아리가 '사대(四大)'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이 감각과 인식의 과정을 오온이라 분석한 것이다. 다석은 다섯 꾸럼이로 옮겼다.

색은 우선 빛깔이 있는 모든 물질을 말한다. 빛깔은 빛이 있어야 나타나는 것이지만 비단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육근(六根)'이라고 부르는 신체의 감관인 눈, 귀, 코, 혀, 몸, 의식(眼, 耳, 鼻, 舌, 身, 意)을 통해 받아들이는 모든 대상을 색(色)이라고 부처는 불렀다. 이 색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受)라 한다. 상(想)은 느낌이 '표상(表象: 마음에 그릴 수 있는 외적 대상(對象)의 상(象))'되는 것을 말한다 한다. 행(行)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며, 식(識)은 외부의 색을 마음으로 알아채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외부의 대상이 기관을 통하여 알아지기까지의 쌓여가는 과정이라 하여 오온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감관을 통한 인식 과정을 이렇게 정밀하게 분석한 성인은 석가가 처음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다섯 꾸럼이가 모두 텅 비어(空) 있는 것을 비추어본(照見) 이는 바로 관자재보살이다. 색은 변하는 것이기에 일정한 상(常)이 없어 무상(無常)하다. 수,상,행,식도 마찬가지다. 모든 색과 오온의 과정은 덧없이 소멸하여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굳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공은 흩어져 있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허공에는 온갖 만유(萬有)의 구성 인자가 다 함유되어 있다. 다석은 하느님을 '없이 계시는 분'이라 했다. 참된 진리는 드러낼 수 없어 언어로는 반어(反語)나 역설(逆說)이 필요하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 모든 쓴 걸림을 건넜다. :

그리하여 일체 모든 고통과 액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온의 작용으로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아상(我相)'이 생겼다. 그렇지만 오온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관자재보살이 깊이 본 것이다. 오온이 없어지면 내가 없어지며 내가 사라지면 쓴 걸림(苦厄)도 사라진다. 그곳이 피안의 세계이며 관자재보살은 이것을 깊이 본 것이라 해석된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은 오온으로 만들어진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관념을 '아상'이라며, 흙, 물, 불, 바람으로 형상되었다가 흩어지는 사대(四大)의 육신에 대한 관념을 '인상(人相)'이라 설명하였다. 피아가 사라진 곳에서 쓴 걸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사리자(舍利子) - 눈 맑은 이야

아난(阿難), 수보리(須菩提), 사리자 등과 함께 스승 부처가 10대 제자 등과 문답하는 것이 불경의 서술 방식이다. 지혜 으뜸인 사리푸트라(사리자)를 다석은 '눈 맑은 이'라고 옮겼으니 최고의 번역인 듯하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