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고객의 신청곡을 들려주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악을 감상하듯 귀 기울이며 흡족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고객을 볼 때면 왠지 모를 궁금증이 생겨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악이 뭐냐고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갑작스런 질문이지만 잠시 후 들려오는 대답은 거의 비슷하게, 장르를 불문하고 자신이 지금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런 음악이 '살아있는 음악' 아니냐고 되묻기도 한다. 일리 있는 표현이라 여겨진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신청하여 감상하려는 곡은 바로 살아있는 음악인 셈이다. 그렇기에 한 곡이라도 허투루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사람의 영혼과 감성을 자극하여 절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곡을 만든 이라면, 최고의 음악가이자 살아있는 음악을 하는 자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정호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가인이었다.

가수 김정호라는 이름을 세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의 인기가 한창일 무렵, 김정호 음악의 결정체라 평가받는 '하얀 나비'를 발표하면서 또 한번의 이목을 끌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국악의 끼가 묻어나는 곡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참 잘 나가던 김정호에게 가수활동의 무덤과 같은 대마초 파동(1975년)이 일어나면서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많은 가수와 연예인이 연루되어 방송금지와 활동을 제약받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 또한 이 사태를 비켜나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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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와 임창제.

시간이 흘러 대마초 파동에 연루됐던 가수들의 방송금지가 풀려 하나둘 활동을 재개할 때 그는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행방불명설', '잠적설'이 나돌면서 매체에서는 온갖 추측성 보도를 내기도 하였다. 인기 정상의 가수였지만 존경하던 신중현과의 첫 만남에 감격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순수했던 김정호도, 대마초 파동은 자신의 노래 '작은 새'처럼 견디기 힘든 좌절과 방황의 길이었다. 거기에다 열두 번의 이사를 해야 했을 정도로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군 복무 중에 심하게 앓았던 폐렴이 악화됐다. 급기야 폐렴이 결핵으로 와병되어 요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두고 '공백'이라 운운하며 무성한 소문을 내는 세인들의 표현을 몹시 못마땅했다고 전한다. 김정호의 어려움을 알고 있던 매니저 이상기와 친동생처럼 아끼던 최무성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그를 위해 1976년 10월 무교동에 있는 라이브 레스토랑 '꽃잎'을 맡겼다. 레스토랑 꽃잎은 1983년 재개발로 헐릴 때까지 그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무대였다. 그는 좌절 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 달 중 20여 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며 음악 혼에 불을 지폈다.

이때 함께 활동이 금지된 가수 하남석은 김정호에게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정도의 둘도 없는 음악친구였다. 두 사람은 국악리듬에 어쿠스틱 기타와 신디사이저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을 구상하면서 재기를 준비했다. 그러던 1984년, 그는 유작이 되어버린 새로운 음반을 내면서 다시 대중 앞으로 나선다. 음반이 제작될 무렵의 김정호는 초췌한 모습 그 자체였다. 재발된 결핵으로 인한 오랜 기간의 병상 생활은 그를 더욱 더 수척하게 만들었고,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 했다. 이미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음반은 1983년 6월부터 11월까지 5개월에 걸친 녹음 기간을 거치면서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님' 등이 수록된 4집 앨범으로 제작되었다.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이 앨범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절절히 베여있는 눈물겨운 음반으로,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아쟁, 가야금, 꽹과리를 직접 뜯고 두들겨가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 했다.

김정호의 외당숙 박종선(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9호 아쟁산조 예능보유자) 명인은 "내가 아쟁을 타고 있으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좋아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국악을 무척 좋아했다. 조카는 국악을 배우지 않았어도 집안에서 타고난 끼가 몸속에 있었다"고 그의 국악열정에 대해 회고했다. 그만큼 국악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의 모습에서 아내 이영희조차도 "음반제작은 뒷전이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다니며 한 시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졌었다"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특히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상여 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로, 한스런 탄식을 노래한 님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 바친 곡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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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 추모앨범.

폐결핵으로 호흡하기 힘들어 한 소절 부르고 쉬었다 하는 방식으로 몇 시간을 두고 녹음할 때, 이미 그의 병은 깊어졌고 의사는 더 이상 노래를 하면 죽는다고 선고를 내린 뒤였다. 하지만 그는 "의사가 내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면 죽는다고 했지만, 오히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며 님을 녹음하면서 그때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김정호가 결핵병원에서 요양하던 시절, 해변을 걷고 있던 여인을 보고 느낀 슬픈 감정을 모티브로 한 곡이라고 한다.

폐결핵 말기로 접어든 김정호는 결국 국립마산결핵병원에서 1985년 11월 29일,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아내 이영희와 여덟 살 난 쌍둥이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김정호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6년 5월, 그를 위한 첫 추모공연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1주기에 맞춰 김정호의 동료와 후배 가수들은 '김정호 추모앨범'을 제작하여 그에게 헌정했다. 그 음반은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긋는 헌정앨범의 효시였다. 김범룡이 '이름 모를 소녀'를 김현식이 '님'을 불렀다. 그리고 송창식은 '잊으리라', 윤시내는 '하얀 나비'를 노래하였고, 한마음은 '빗속을 둘이서', 서수남과 하청일은 '사랑의 진실'을 유승배가 '작은 새'를 맡아 그가 남긴 주옥같은 노래를 불렀다. 이들 외에도 전영록, 김학래, 홍민, 이정선 등 후배 가수들이 앞 다퉈 김정호의 추모앨범을 만드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으며, 각자 다른 소속사를 두고 있었지만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KBS 음반기획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그를 위한 추모공연은 2008년까지 다섯 번이나 계속되어 김정호는 우리나라 최다 헌정공연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최초로 헌정앨범을 헌사 받게 되었다.

음악을 하는 뮤지션으로서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한 추모공연을 헌정해 준다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대중음악 헌정 공연사에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운 김정호는 또 하나의 전설로 추앙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간다간다 정든 님 떠나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님의 손목 꼭 붙들고 애원을 해도

님의 가슴 부여잡고 울어 울어도

뿌리치고 떠나가더라.

속 절도 없이 오는 정 가는 정에

정이 들어 사랑을 했던 님

어쩌면 그렇게도 야속하게 가시나요.

허~ 허~ 간다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우~ 우~ 우~

-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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