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커녕 99% 외면·농락한 권력자…엉망인 현실서 무섭게 살아가는 국민

12년 전 일이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국회를 출입하는 지역신문 기자들을 집에 초대했다. 강남구 삼성동에 높은 담이 인상적인 주택이다. 현관에 들어서자 바로 2층으로 안내받았다. 1층과 2층 사이 그랜드 피아노만 한 대 있던 방도 기억난다.

전여옥·주성영·김정훈 의원이 당 대표를 보좌했다. 전여옥 의원이 대표 옆에서 입 역할을 했고 주성영·김정훈 의원은 술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세 명 가운데 김정훈 의원만 현직 의원이다. 당 대표는 저녁 식사 내내 미소만 지었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려운 자리를 마련해서 고맙다는 인사와 앞으로 잘 풀릴 것이라는 덕담이 이어졌다. 발언 순서가 되자 짧게 한마디 했다. 51%에게 지지를 얻는다면(현실이 될 줄 몰랐다) 나머지 49%를 생각하는 정치를 해달라(현실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당 대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수첩에 적지는 않았다.

전여옥 의원은 분위기가 처진다 싶으면 너스레를 떨었고 주성영·김정훈 의원은 잔을 들며 장단을 맞췄다. 참석자 술잔은 모두 계영배(戒盈杯)였다. 잔을 채우다 일정 수위가 넘으면 술이 모두 아래로 새는 잔이었다. 실제 술을 계속 따랐더니 그렇게 돼서 놀랐다. 이날 당 대표가 한 말은 '고맙다', '잘 부탁한다', '네' 세 마디 정도였다.

집을 나서며 대부분 참석자는 당 대표가 보인 기품, 태도를 언급했다. 영애(令愛) 또는 공주답다는 말이 대부분이었는데, 한 부산지역 일간지 기자가 툭 던진 말이 아직 맴돈다.

"그냥 이 안에서 공주처럼 살면 좋겠구먼…."

18대 대통령 임기가 14개월 정도 남았다. 최근 쏟아지는 보도를 보면 독재시대까지는 각오했는데 봉건시대를 살고 있었나 보다. 게다가 이 정도면 봉건시대라고 쳐도 가장 수준이 낮은 '수렴청정' 아닌가? 최순실 또 최순실 그리고 최순실 해시태그(#) 최순실이다. 가벼운 접촉사고인 줄 알았더니 차 엔진까지 완전히 망가진 모양새다. 고쳐서 탈 수 있겠다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51%에게 얻은 지지로 49%를 배려하기는커녕 한 사람을 위해 99%를 외면하고 농락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4일 국회에서 개헌을 언급했다. 느닷없이 두 개 조항이 떠올랐다.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두 개 조항을 건들면 대통령을 둘러싼 반헌법적 비정상을 한 번에 정상화하는 효과를 얻을 수는 있겠다. 설마!

그나마 '계엄'이 아니라 '개헌'이라서 고마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계엄'이 무섭고 전쟁이 무섭고 지진과 핵발전소가 무섭다. 진심이다.

12년 전 삼성동 주택을 향해 한마디 툭 던졌던 그 선배와 잠시 걷고 싶다. 높은 담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그 주택 주변을 지나는데 피아노 연주가 멀리서 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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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 안에서 공주처럼 살면 좋겠구먼…."

"전에 봤을 때 기품이 있더라고요. 정치바닥과 어울리는 분이 아니지요."

그런 상상을 억지로 해본다. 현실은 엉망인데 지독하게 한가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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