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27편

◇폰페라다에서 페레헤까지 27.1㎞

새벽 6시에 문을 열어주는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라서 오늘도 조금 여유가 있네요. 5시 40분이 되니 문을 열어줘서 출발을 하는데 오늘은 가장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출발을 했답니다. 20여 명이 한꺼번에 군인들처럼 행군하듯 가는 그 모습이 다들 재미있는지 즐거운 표정들입니다. 어차피 중간에 다들 헤어지겠지만 그래도 몇 팀은 꼭 같은 알베르게로 가게 되더라고요.

다들 뿔뿔이 헤어졌는데도 길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큰 도시를 하나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아마 폰페라다에서 출발한 사람도 많나 봐요. 어린 학생들도 많이 보입니다.

카카벨로스(Cacabelos)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우리 팀은 어떤 바르(bar)로 들어갔어요. 이곳은 순례자에게 와인과 엠파나다(empanada·군만두처럼 생긴 스페인빵)라는 빵을 무료로 주는 곳이었습니다. 거기다 화장실도 무료로 쓸 수 있고요. 혼자 왔으면 이런 정보를 몰랐을 텐데 스페인 친구들하고 다니다 누리는 호사였어요.

날씨는 어마어마하게 더워요. 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를 지나는데 이곳도 오래된 도시처럼 보였어요. 다들 그곳에서 묵어가는데 우리 팀은 4㎞를 더 간답니다. 그런데 저랑 주선(한국인 동료)이는 이미 방전이 되었어요. 다들 우리를 앞서 가버렸고 하도 배도 고프고 힘이 들어서 우리 둘은 길가의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어요. 거기서 뭘 좀 먹고 쉬고 나니 그제야 힘이 좀 나는 겁니다. 그런데 4㎞가 왜 이리 먼가요. 주선이는 저보다 더 못 따라오고 이젠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다리 허벅지 쪽이 아파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이곳을 걷기 시작한 후 힘든 날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날이에요.

겨우 페레헤(Pereje)에 도착하니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씻고 나오는 걸 기다려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이곳의 유일한 바르 겸 레스토랑이죠. 식사 후 평소에 안 자던 낮잠도 자고 일어났는데도 피곤해요. 모두 물가로 수영을 하러 간다고 하네요. 개울에 갔는데 물이 너무 맑고 시원한 거예요. 발만 담가도 더위가 모두 물러가기 때문에 다들 수영할 생각은 안 하고 물수제비 뜨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하 호호' 재미가 있어요.

페레헤 물놀이.

이렇게 놀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지원이와 주선이를 데리고 저녁 겸 맥주 한 잔 사 주러 바르로 갔습니다. 샤롯데와 카리나도 와 있더군요. 조금 있으니 우리 팀의 나머지도 모두 바르로 왔습니다. 저녁을 안 먹고 자기가 어려웠나 봐요. 모두 한 잔씩 하며 친목을 다졌고 바르에서 서비스로 보드카가 나오자 분위기는 더욱 좋아집니다. 기분 좋게 알베르게로 돌아왔죠.

내일도 난코스라서 모두 배낭을 부치고 걷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냥 지고 가고 싶었는데 다들 보낸다고 해서 저도 그냥 부치기로 했습니다.

◇페레헤에서 오세브레이로까지 23.8㎞

어제 사놓았던 빵과 과일로 함께 아침을 먹고 5시쯤 출발을 했습니다. 가다가 바르에 들러 커피도 마십니다. 배낭이 없어 여유롭습니다. 큰딸에게 전화를 해서 니나, 샤롯데, 카리나와 통화를 하게 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한 거예요. 원래 성격이 밝은 니나는 서툰 영어로 딸과 통화를 한참 하더라고요. 전화를 하고 나니 더욱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길옆에 흐르는 물도 깨끗하고 갖가지 야생화도 반겨 주고 좋은 친구들과 스페인의 시골길을 걸어가는 기분 정말 좋았어요. 바르에 들러 간식도 챙겨 먹고 나니 산길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장난이 아니게 힘들어요. 배낭까지 졌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 산 위에 오르니 경치는 멋집니다. 이런 풍경들을 보며 걷는다는 게 꿈만 같습니다.

오세브레이로 가는 산길.

갈리시아(Galicia)주로 접어들었다는 표지석을 지나 얼마를 걸어가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오~! 세브레이로! 경치도 아름다운 오~! 세브레이로! 순례길 중 가장 신비로운 장소라는, 또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오 세브레이로(O'cebreiro)가 나타납니다. 시간은 오전 11시, 아직 벗겨지지 않은 구름바다가 우리를 반겨줍니다.

일년 내내 안개가 자주 낀다는 이곳, 높긴 높은가 봐요. 알베르게에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예쁜 경치에 홀려 있습니다.

갈리시아주 경계석 앞에서.

오후 1시에 알베르게 문을 열어서 두 시간이나 기다리려니 지루하기도 했지만 배낭을 줄 세워놓고 성당에 가서 기도도 하고 알베르게 문 열면 해먹으려고 스파게티재료도 사놓고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오늘은 비센테가 요리를 한답니다. 맛있게, 재밌게 식사를 했어요.

이곳은 1300 고지쯤 되는 높은 곳이다 보니 올라오기는 힘이 들었어도 날씨도 선선하고 산책하기가 좋았어요. 우리나라 초가집 같은 고대 켈트족의 전통가옥 '파요사'가 인상적이네요. 모두 네 채가 보존되어 있대요. 작은 동네라서 별로 갈 데는 없었지만 동산 같은 데가 있어 올라갔더니 사방이 트여 있었고 그곳에서 본 전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어요.

오세브레이로 마을에 남아 있는 고대 켈트족 전통가옥 '파요사'.

신심이 깊은 니나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서 이 지역 특산물이라는 문어요리 '폴포(Pulpo gallega·갈리시아 지역의 명물 문어 요리)'를 먹으러 갔어요. 맛있다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소금과 고춧가루에 묻혀 나오는 게 매콤하기는 한데 그다지 추천할 만하지는 않네요. 주인장께는 미안합니다!

해지는 풍경을 본다고 모두 자러 들어갈 생각을 안 하네요. 스페인 청년들과 이메일도 주고받고 사진도 찍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합니다. 아마 순례길이 아니었으면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을 게 틀림없어요. 오세브레이로의 해지는 풍경은 장관이었습니다.

스페인 순례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을 오세브레이로 전경.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