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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창선 황금빛 바다·갯벌 너는 감동이어라

[남해 바래길에서 사부작] (20) 바래길 외전 2편-강진만 낀 창선면 해안도로

이서후 기자 who@idomin.com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남해군 강진만에 노을이 진다. 바다는 온통 노을빛이다. 건너편 설천면, 고현면의 산등성이들 그리고 바다 위 섬들의 검은 그림자가 햇살과 대조를 이루며 운치를 더한다. 아, 이런 거였나. 창선면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의 일몰이 환상적이라는 어느 어르신의 말도, 이 주변에 유달리 '노을'이란 이름이 들어간 펜션이 많은 이유도 이해가 된다. 그야말로 찬란한 황금 바다. 넓게 드러난 갯벌에도 노을이 스며든다.

1960~1970년대 찢어지게 가난하던 어촌마을 주민들이 1980년대 이 강진만 갯벌에 조개 양식을 시작하며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하여 강진만은 또 다른 의미에서 황금 바다이기도 하다.

◇단항 왕후박마을

남해바래길 외전. 두 번째로 선택한 곳은 남해군 창선면 왼쪽 해안도로. 강진만을 끼고 도는 1024번 지방도를 따르는 길이다. 삼천포에서 창선·삼천포대교를 지나면 단항사거리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이내 단항마을.

이 마을에 제법 유명한 노거수(老巨樹) '왕후박나무'가 있다. 나무는 바닷가와 마을 사이 들판에 있다. 풍채가 좋아 멀리서 봐도 두드러진다. 500살이 넘은 나무시란다. 국가 천연기념물 299호. 높이는 9.5m, 뿌리에서 11개 가지가 뻗어 있는데 긴 것은 10m가 넘는다. 후박나무는 경상, 전라 지역 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왕후박나무는 이 후박나무의 변종인데 창선 외에 진도, 홍도에도 비슷한 게 있다고 한다. 단항 왕후박나무는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이 매년 섣달 그믐에 제사를 지내던 당산나무인데 그 위엄이 상당하다.

왕후박나무

"동네 백살 넘은 할배들 어릴 때부터 나무가 이만했다 카더라. 나도 팔십이 다 됐는데 어릴 때부터 이래 컸지. 요즘은 당제는 안 지내제. 시대가 안 그렇나. 그래도 이 나무에 제를 지내고 해서 자식들이 출세를 하고 그랬는데…." 마을 어르신의 이야기 끝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단항 왕후박나무에는 전설이 두 가지 깃들어 있다. 하나는 이 나무의 탄생 설화다. 500여 년 전 단항마을에 늙은 부부가 살았다. 매일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렸는데, 하루는 할아버지가 큰 물고기를 잡았다. 고기 뱃속에서는 이상한 씨앗이 하나 나왔는데 이걸 집 앞에 심었더니 지금의 왕후박나무로 자랐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에는 대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노량해전(1598년)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 마을에서 대나무와 짚을 구해 배 위에 싣고 전투 중에 불을 질렀다. 불이 붙은 대나무는 마디가 터지면서 '펑펑' 하고 소리를 내는데, 왜적들이 이것을 대포소리로 알고 도망을 쳤다. 그러고는 이순신 장군이 이 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고 쉬었다는 이야기다. 이 나무를 달리 '이순신 나무'로 부르는 이유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마을이 부촌으로

단항마을에 이어 대벽, 소벽마을을 지나니 제법 큰 섬을 만난다. 율도(栗島), 그러니까 밤섬이다. 마을이름도 율도마을이다. 섬 아래는 암석이고, 윗부분은 나무가 자라 밤 모양이라는데, 실제로 보니 잘 모르겠다. 옛날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이 섬 역시 강진만 여느 섬처럼 썰물이 되면 마을과 연결된다. 다음에 만난 서대마을은 들판이 가지런하고 너르다. 나락이 여문 모양새를 보니 올해 농사가 잘된 것 같다. 추수가 한창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새참을 먹던 주민들이 같이 먹자고 손짓을 한다. 빵과 음료수를 두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서대마을은 올해 강진만 조개 양식으로 10억을 벌었단다. 가구마다 1000만 원씩 돌아가는 소득이다. 예전보다 수익이 줄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 갯벌로 스며드는 강진만 노을.

사포마을을 포함해 강진만 주변 마을 주민들은 쌀 농사도 짓고 조개 양식도 하고 물고기도 잡는다. 반농반어(半農半漁)다. 오래된 생활양식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요즘처럼 소득이 높지 않았다. 심지어는 곡식이 없어 다른 마을로 꾸러 가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바뀐 건 조개 양식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새조개와 피조개 같은 것들이다. 사포마을을 지나서 만난 광천마을은 강진만에서 가장 먼저 양식 새조개를 수출한 곳이다. 마을을 지나는 개울이 넓어 넓을 광(廣), 내 천(川)자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그리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동네 안으로 길을 내면서 줄어들었으리라.

"옛날에는 참 못살았지." 광천마을에서 만난 어르신은 동네를 둘러보며 옛 생각에 잠긴다. "바닷가라 물을 못 대가지고 농사도 잘 못 짓고 그랬지. 요새야 지하수 파가지고 농사도 다 짓고, 바다도 돈이 많이 되고, 집집마다 차가 한 대씩 다 있고 그란다." 바다가 돈이 많이 된다는 말은 조개 양식을 뜻한다.

사포마을회관

광천마을을 지나 사포마을로 들어선다. 버스정류장에 있는 마을 소개는 이렇다. "60, 70년대 다른 마을로 곡식 팔러 갈 정도로 가난했던 창선면 사포마을. 지금은 창선면에서 가장 부자마을로 손꼽혀 주민들은 한결같이 피조개가 우리 마을을 살린 것이라고 말한다." 1980년대 사포마을은 조개 양식으로만 가구당 2000만 원 정도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조개 공동 양식으로 돈을 번 주민들은 공동수익에서 1억 원을 내 마을회관을 새로 지었다. 지금도 이 회관은 번듯한 마을회관으로 쓰인다.

지족에 이르기 전 마지막으로 나오는 신흥마을은 이런저런 체험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신흥해바리마을'로 불린다. 해바리란 이름은 원래 '훼바리'라고 밤에 횃불을 들고 고기를 잡던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마을은 또 남해군에서 유자가 처음으로 생산된 곳이라고 기록은 전한다. 마을로 들어서면 곳곳에 유자밭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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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후 기자

    • 이서후 기자
  • 문화체육부에서 문학/영화/연극/뮤지컬 등을 맡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