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많지만 엉키면 죽는 칡과 등나무…얽혔다고 잘라내지 말고 찬찬히 풀어야

"할배~ 보리 베요?" 하고 지저귀는 휘파람새 소리를 기억하신다면 아마도 모두 그 넘기 힘들다는 보릿고개를 넘어오신 분들이리라. 길고 긴 봄날 묵은 양식 떨어지고 쌀독엔 빈 종구라기만 뒹구는데 아직 풋내 머금은 보리밭에는 야속하게 푸른 파도만 일렁거린다. 밭둑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면 새도 배가 고파 보리 벨 때가 됐는가 물어보듯 하는 계절이다.

아이들은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찔레 순을 꺾고 삘기를 뽑았다. 갓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이나 개구리도 닥치는 대로 잡아 구워 먹었다. 이 배고픈 봄날 시골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군입거리는 칡이었다.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서부터 덩굴에 새순이 제법 자랄 때까지 괭이를 들고 칡을 캐러 다녔다. 나무칡이라 불렀던 뼈칡은 쓰고 질기지만 통통한 살칡은 즙이 많으며 달고 부드러워 먹기 좋을 뿐만 아니라 녹말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허기를 면하기도 하거니와 제법 근기도 있었다. 

도시락에 담을 꽁보리밥은커녕 고구마 감자조차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튼실한 살칡 두어 토막 씹어 먹고도 오후 내내 운동장이 비좁게 쫓아 다녔다. 칡은 구황으로 쓰일 뿐 아니라 여러모로 유용했다. 땔나무를 지고 오다 새끼줄이 터져 짐이 뭉그러질 때 근처 칡덩굴을 걷어 다시 동여매면 오히려 새끼줄보다 더 튼튼했다. 콩과 식물이라 잎은 소나 염소에게도 최고의 먹이였다. 껍질은 동아줄이나 꼴망태, 바구니를 만들기도 하고 겉껍질을 벗기고 다듬어 삼배보다 시원하고 질긴 갈포로 옷을 지어 입었다. 칡꽃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피는데 숙취 해소와 구토, 장출혈에 좋다 하여 효소를 만들거나 차로 우려먹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 버릴 게 없던 칡이 요즘은 골칫덩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민둥산이라 땅 위에서 자라던 칡은 햇빛을 많이 필요로 하는 양지 식물이라 숲이 울창해지면서 다른 나무를 감아 올라야 살 수 있는 해바라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칡은 살지만 나무는 칡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칡은 덩굴손을 내어 작은 가지를 잡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제 몸통으로 욱죄어 감아 오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꼭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아 오른다. 얼마나 단단하게 감는지 떼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감아 오르는 대표적인 식물이 또 있는데 바로 등나무다. 등도 아주 유용한 식물이다. 줄기를 잘게 쪼개어 시원한 등거리를 만들어 입거나 가구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쓴다. 등꽃은 근육과 골격의 동통, 혈액순환, 해독, 야뇨증에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칡과 반대인 시계 방향으로 감아 오른다. 이 두 덩굴이 한 나무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감고 오르면 어떻게 될까? 얽히고설켜서 종당에는 나무가 욱죄어 자라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무가 쓰러지면 햇빛을 좋아하는 두 덩굴도 숲 바닥에서 서로 뒤엉켜 풀지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그나마 같은 방향으로라도 꼬였더라면 조금 풀기 쉬울 것임에 서로가 서로에게 방향을 바꿔주기를 바라면서도 저는 죽자고 제 방향으로만 감아 나가 스스로 더욱 더 꼬이게 만든다. 나무도 살고 저들도 살려면 제 길 외에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버려야 산다. 서로 방향을 바꿔 보면서 나무를 먼저 풀어 주고 덩굴손으로 주변의 작은 가지를 이용해 서로 얽히지 않고 햇살 좋은 곳으로 올라야 살 수가 있다.

박보근.jpg

공장에서 숙련공들은 긴 호스류를 끌고 다니며 작업하다 일이 끝나면 둥글게 사려서 정리하고 퇴근할 때 절대 한 방향으로 사려 놓지 않는다. 왼쪽으로 한 번 감으면 오른쪽으로 한 번 감는 식으로 사려둔다. 그러면 다음날 호스를 끌고 나가면 꼬이지 않고 술술 풀린다. 초보들은 보통 한 방향으로 사려 두었다가 다음날 배배 꼬인 호스에 오히려 제가 끌려 다니며 된통 애를 먹는다. 서로 얽히지 않게 방향 좀 바꿨다고 해서 덩굴손의 힘을 빌려 부딪치지 않고 느슨하게 감아 올랐다고 해서 칡을 보고 등이라 하지 않고 등나무를 칡이라 하지는 않는다. 

예부터 칡과 등나무가 자라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시정에 칡과 등나무가 너무 무성하게 자랐다. 얽히고설켜 풀어내기 요원하다고 덩굴과 나무 통째로 덜컥 잘라버리지 말고 찬찬히 방향도 틀어주며 풀어내 보자.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서로가 상처 없이 온전해야 하지 않겠나.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