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반장'에 편가르고 줄서기…이익·생존 좇는 구태정치 닮아 씁쓸

어느 날 문득 옛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잘 계시죠? 이젠 두 아이 아빠 됐어요. 그땐 선생님 속 많이 썩였었는데…." 제자는 오래전 얘기를 한참 동안 늘어놓는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저 생각나시죠?" "그래 이놈아. 시간은 좀 지났지만 생생한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난감해하며 우왕좌왕하던 시절 제자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반장 뒤에 앉아 반장 제쳐두고 온갖 권력 행사하며 악행(?)까지 일삼던 아이였다. 담임 몰래 친구들 협박해 돈 거두며 괴롭히고, 친구가 새로 산 교복을 자기 것으로 바꿔치기하기까지 했다. 요즘 같았으면 학교가 발칵 뒤집혔을 상황이었다. 교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귀띔해주길 바라는 담임 처지에서 보면 반장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사실은 반장 선거할 때부터 허수아비 조짐을 보였다. 아이들은 가장 무난하고 간섭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을 반장으로 뽑았다. 그래도 민주적 선거 절차에 따라 아이들이 뽑은 반장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떡볶이를 쏘겠다' '빵과 아이스크림을 쏘겠다' 같은 물질 공세를 퍼부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 몇 달은 교실이 평화스러웠다. 교실 구성원 모두를 아우르겠다는 포부도 밝힌 터여서 담임으로서는 기대감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방학 지나 2학기로 접어들어 가을이 될 무렵부터 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서슴없이 개인행동을 일삼는 아이들. 청소 팽개치고 도망가는 아이들. 교실 바닥에 함부로 휴지 버리는 아이들. 지각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 사소한 다툼도 이어졌다. 편을 갈라 싸우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교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하여 갔다. 어떻게라도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늦게라도 동료 교사들 조언을 듣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문제의 핵심은 담임 역할과 반장 역할이 부족한 데 있었다. 특히 허수아비 같은 반장은 제대로 된 리더십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기가 친한 사람은 봐주고 맘에 들지 않으면 내치는 유형의 반장이었다. 알고 보니 몇몇 힘 있는 아이들이 주도해서 뽑은 '바보 반장'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각자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여겨지는 친구를 반장으로 뽑았다. 자신의 개인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방향으로 투표를 한 것이다. 학교와 친구들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는 반장.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반장을 뽑아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망이 정말 컸다. 그 시절 그 상황 얘기는 힘든 시기 지나고 어떻게든 학년이 마무리되면서 뇌리에서 잊혔다.

참으로 오랜만에 옛 담임을 찾아 전화한 그 아이는 전화 통화에서나마 사과의 말을 이어갔다. 꽤 길게 이어진 대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그때 반장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친구들 괴롭히고 담임 선생님 속상하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담임 선생님 몰래 벌어진 일들 중엔 제법 큰일들이 있었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친구를 폭행해 상처를 입힌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담임이 몰랐단 사실에 부끄러운 마음이 꽤 들긴 했지만 "그래!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잘못을 뉘우친다니 고맙네!" "다음에 만나면 내가 소주 한잔 살게!" 짧게나마 그때 만났던 아이들 대신해 이제라도 용서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제라도 그렇게 얘기해주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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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교실은 세상의 축소판이라고들 하는데…. 그때 상황이 지금 정치 상황과 매우 닮은 것 같아 씁쓸한 맘 감출 수가 없다. 청와대에서, 국회에서 높으신 분들이 하는 정치도 늦게나마 사과의 말 전하는 그 아이 맘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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