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여행

어디로 가는지 값이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국경절 연휴에 남편 생일이 들었고, 일회용 미역국에 혼자 밥 말아 먹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아내는 길을 나섰다. 6억 6000만 명이 이동하고 우리나라에도 25만 명이 몰려온다는 언론의 협박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반백의 남편과 함께 따신 밥 한 끼 해야겠다는 생각에 18호 태풍 차바를 거슬러 아내가 날아온 곳이 태항산이다.

석가장 공항에 앉아 아내를 기다리며 글을 쓴다. 이번 여행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같이 짐 싸고 공항에서 차 마시고 면세점에서 싸우던 여행길이 아니다. 아내는 남편의 홀로된 생일을 구제하러 오고, 남편은 혼자 집을 지키며 부모 자리, 자식 자리를 채우는 아내에게 잠시 쉴 자리를 내주고 싶었다. 울산에서 온 일행 일곱 명과 함께 아내가 나왔다. 단체 비자 1번이란 자랑질부터 늘어 놓는다. 어떤 감투든 다른 사람보다는 책임이 무거운 법이다. 산서성 성도인 태원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타고 난 후에야 일정표를 꺼내 본다.

태항산이란 산은 없다. 산동과 산서를 남북으로 가르는 태항산맥에 꽤 볼 만한 자연과 문화유산이 있는데 이를 통칭해서 그리 부르는 것이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지만 2년이 지나도록 여행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곳에 먼저 온 사람들이 "국경절 연휴 때 여행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며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그리 따지면 평생 길을 나설 수 없다. 일단 떠나고 보자는 하룻강아지 정신이 필요하다. 익숙하고 검증된 길만 찾는 사람들에게 내일은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닦아 둔 새로운 길에서 문명을 향유할 수 있을지 몰라도 평생 2등 이하로만 살아야 한다.

이번 여행은 평요고성과 면산을 거쳐 남으로 내려가 왕망령, 천계산, 만선산을 지나 임주에 있는 태항대협곡을 보는 여정이다. 산에는 벌써 가을이 들었다. 절벽을 감아 오르는 담쟁이 잎이 유난히 붉다. 장엄한 풍경보다 그곳에 길을 내고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용기에 놀라고, 앞이 보이지 않는 산길에서 웃으며 손잡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놀란다. 절벽 끝 굽은 길로 쉴 새 없이 버스가 오르내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지만 아무도 위험을 느끼지 않는다. 크게 지은 죄없이 환갑을 넘긴 사람들의 여유가 깊은 주름 위로 환하게 피어난다. 여정의 끝에서 비는 그쳤다. 내려올수록 세상은 무겁고 잠시 덜어냈던 상념이 무릎 아래로 잠겨온다. 태풍에 잠긴 자식들의 집과 살림이 걱정이다. 생일이었다는 사실은 잊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는 건 기억한다. 석가장 공항에서 다시 혼자가 되는 게 싫어 호텔에서 먼저 가겠다고 우겼지만 의지대로 갈라서지 못했다. 공항에서 짐을 다 부친 아내가 다시 나와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건넨다. 두고 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뿐이니 슬퍼하지 말자며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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