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돋보기]사과 주산지 거창 '일소피해' 대책 마련 골몰

지난여름의 전례 없는 불볕더위는 우리 모두를 많이 지치게 했다. 중요한 변화는 대부분 작은 징후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에어컨 판매 대수가 전년 대비 30%나 증가하고 모기가 사라지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농가의 불청객인 미국선녀벌레, 매미충 등 외래 해충이 두 배 이상 증가하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과수농가들은 또 다른 2차 피해를 심각하게 겪어야 했다. 올해는 물론 앞으로의 대책 마련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름조차 생소한 '일소(日蘇)피해'가 그것이다. '일소피해'란 기후변화에 따른 불볕더위가 불러온 새로운 과수 피해 유형으로서 햇볕에 과일이 타버린 현상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거창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과 주산지다. 지역 농업의 주 수입원이 새로운 형태의 피해를 보게 되자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방안을 궁리하고 있으나 뾰족한 묘안이 없는 듯하다. 자연재해는 그만큼 대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햇볕에 타버린 사과. /거창군

◇일소(日蘇) 현상과 피해 규모 = 일소피해는 35℃ 이상 고온이 7일 이상 지속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거창은 주품종인 홍로가 추석 성수기 출하를 앞두고 수확기를 맞은 상태여서 더 큰 피해를 보았다.

거창군은 불볕더위가 절정에 달한 8월 23일 기준으로 홍로사과 재배면적 570㏊ 중 50㏊ 정도가 일소 손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어림짐작으로 8~9% 선을 피해율로 잡았지만 실제 과수농가의 체감 피해율은 30%를 넘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불볕더위 피해가 비교적 어린 작물에 집중된 것으로 보면 귀농한 지 3~4년 된 농가의 신규 과원은 70%까지 피해를 본 경우도 있다.

거창은 경남의 서북부에 자리 잡은 산간지대로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고랭지 채소와 사과, 오미자, 포도 등 초가을 수확 작물이 지역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과 전체 매출액만 해도 1000억 원이 넘고 홍로 단일 품종만으로도 4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국적으로도 피해가 잇따르자 9월 중순경 농림축산식품부와 농협은 화상 입은 사과인 일소사과 1800t을 가공용으로 수매한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사과농사는 가능한 한 많은 햇볕이 사과 열매에 닿아 사과의 숙성과 착색에 도움이 되도록 나무 밑에 반사필름을 까는 등의 부수적인 방법을 동원해왔다.

또 다른 과일과 달리 사과는 열매 주변의 잎이 사과를 가리게 되면 가려진 부위가 제대로 착색되지 않아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잎을 솎아주었다.

그러나 이번 불볕더위로 이 같은 반사필름이나 잎을 솎아낸 데 따른 부작용으로 피해가 더 커졌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제도적 문제점은 무엇인가? = 이처럼 전통적인 과수농법들이 기후변화에 따라 오히려 사과농사를 망치는 주범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면서 지금까지의 과일 농사 방법에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여름인 8월을 기준으로 가장 무더운 한 해를 보냈지만 가을 기운이 찾아오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벌써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가고 있다.

8월 불볕더위일 수가 17일을 채우며 한 달의 절반 이상을 고통 속에서 보내고도 이에 대한 대책도 가을과 함께 사그라지는 것이다.

농작물에 손해를 입었을 때 피해에 대한 지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농어업재해보험법 재해보험이고, 또 하나는 농어업재해대책법에 따른 피해보상이다.

그러나 불볕더위는 농어업재해보험법에서 정하는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 반면 농어업재해대책법에는 재해에 포함되는 이중 잣대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회에서 불볕더위를 자연재해로 포함하는 개정안을 발의 중이지만 보험금을 받고자 농사짓는 농민은 없을 것이다.

이 밖에도 불볕더위로 채소의 소비자가격이 폭등했지만 생산자인 농민의 소득으로 연결되지 않아 농업인은 그들대로 울상이다. 작황은 작황대로 나쁘고 소비자가격은 폭등했지만 산지가격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은 "온난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사과는 21세기 중반에는 대관령에서만 재배할 수 있고 21세기 말에는 우리나라에서 사라진다"는 전망을 한 바 있다.

일소 손해를 입은 농민을 돕고 성수기 조생종 사과 가격 안정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과실수급안정사업적립금'으로 일부 수매를 했으나 과수농들이 피부로 느끼는 상실감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환경은 느리게 변하는 것 같지만 대책은 더 느려서 농민들은 마음이 급하다. 불볕더위 피해의 재해보험 반영은 물론 고온에 강한 대체 품종 개발 등 정부 차원의 중장기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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