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샛길 사라졌지만 추억은 그 자리에…매년 5촌 아저씨와 산소 가는 길 어릴 때 함께 놀던 기억 더듬어

매년 추석이면 함안군 여항산 자락에 있는 선산에 성묘를 갑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산소로 가는 길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명절 때마다 우거진 숲을 헤지고 다녀야 합니다.

성묘는 항상 아재(5촌 아저씨) 3~4명과 함께 합니다. 이제 60, 70대인 아재들은 만날 적마다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한 동네서 같이 자랐으니 공유하는 추억이 많습니다. 솔직히 어릴 적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지겨웠습니다. 공감도 안 되는데다가, 작년에도 한 이야기고, 재작년에도 한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 이야기들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재들이 어릴 적, 여항산에는 늑대도, 여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여우를 '야시'라고 했답니다. 야시가 캥캥 울면 으스스한 게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모른답니다. 늑대도 자주 나타났다고 합니다. 요즘 셰퍼드처럼 생긴 놈들이라네요. 늑대가 와서 돼지를 잡아가 버린 이야기도 했습니다.

미군들 시체 이야기도 항상 빠지지 않습니다. 여항산 일대는 한국전쟁 격전지 중 하나입니다. 인민군과 미군의 전투가 격렬했지요. 여항산을 다른 말로 '갓데미' 산이라고 하는데요. 당시 미군이 여항산을 두고 '갓뎀'이란 욕을 한 데서 유래했답니다. 아재들이 어릴 때는 막 전쟁이 끝난 직후였지요. 아이들은 너도나도 뒷산을 누비며 미군이 남긴 물건을 줍던 시절이었습니다.

추석 성묘 길이 거의 사라져 숲을 헤치고 가야 한다. /이서후 기자

어느 날 산 중턱에 미군이 쓰던 담요가 깔끔하게 깔린 것을 발견했는데요. 서로 먼저 갖겠다고 달려갔지요. 담요를 잡아채고 보니 그 아래 미군 흑인 병사의 시신이 있더랍니다. 워낙 미군 시신이 많던 곳이라 그게 뭐 대단히 큰 사건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시신들 사이를 누비는 아이들이라니요, 시대가 참 잔인했습니다.

산소를 다 돌고 동네로 내려오면서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어릴 적 아재들이 뛰어놀던 샛길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술을 먹고 객기를 부려보던 베꾸마당(마을 바깥마당의 경상도 사투리. 타작도 하고 벼도 말리고 마을 잔치도 하던 곳)도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기억뿐입니다. 이제 그 기억마저 사라지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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