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꿈을 안고 새내기들이 온다/ 버드나무 생머리 찰랑이며 깡충깡충 온다/ 아버지는 일생만큼이나 낡고 무거운 짐 가방을 끌고/ 어머니는 살림살이를 머리에 인 채 아버지의 가방을 민다/ 당산 탄광 같은 아버지의 얼굴/ 황하보다 깊은 어머니의 주름위로/ 아직은 서툰 꿈이 살모사처럼 기어오르고/ 누런 해가 하루의 먼지를 털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 등에 달린 작은 가방에 하나 둘 세월이 담기면/ 오늘 저무는 해가 문득 그리워 질 것이다.

중국의 신학기는 9월에 시작된다. 입학 정원이 2500명 정도인 학교에 5000명 가까운 신입생을 모집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다. 기숙사, 강의실, 식당, 교강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오늘부터 3일 간 신입생 등록기간이다. 정문 광장에 학과별로 천막을 치고 입학 등록을 받는데 여기서 실제 학교에 다닐 신입생 수가 정해진다. 입학 등록을 마치면 기숙사가 배정되고 비로소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짐을 지키고 있던 부모님들과 함께 기숙사로 향한다.

외부 차량 진입이 철저히 통제된 캠퍼스에 사람의 힘으로만 짐을 옮겨야 하는 개학 풍경이 낯설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짐을 밀고 당기는 부모님들의 모습은 피난 행렬을 연상케 하지만 너무 밝은 표정에 도리어 숙연해진다. 허리가 부서지는 고통을 잠시 잊고 씨감자까지 다 팔아 마련한 천원을 아이 손에 더 쥐여 주고 기차역까지 시오리 길을 걸어서 돌아간다.

정직한 자는 무너진 육신만큼 삶이 빈한하다/ 육천 평 감자밭 사철 내내 물고 뒤집어 오 만원 손에 쥔다/ 그 반을 털어 하나뿐인 딸내미 기숙사 오는 길/ 바퀴 빠진 가방 머리에 이고/ 만면에 웃음짓는 그들이 부처다.

내리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다. 기쁨은 슬픔의 궁극으로 완성되고 행복은 희생의 고해를 건너서 온다. 이 슬픈 희생을 견디기 위해 하나님은 '아가페'란 마약을 주셨다. 나의 행복 뒤에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으므로 지금 또 다른 행복을 나누기 위하여 희생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내리사랑은 눈물겨운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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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소나기가 온다. 천둥소리에 놀란 아이를 품는 어머니의 등에 이미 물길이 났다. 길 건너 가게에서 비닐우산을 사서 뛰어 오는 아버지는 또 헛발질을 한 것 같다. 배수로가 없는 길에서 어머니는 자기보다 큰 아이를 업고 가방을 이고 맨발로 물길을 헤쳐가고 아버지는 소용없는 우산을 받쳐주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슬프면서 따뜻한 개학풍경을 보면 학도호국단 시절 대학을 다닌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때 내리사랑을 알았더라면 하나뿐인 아버지의 점퍼를 덥석 받지는 않았을 것을, 속이 안 좋으시다며 건네주는 어머니의 자장면을 다시 돌려드렸을 것을. 환갑에 철이 든다.

/김경식(시인·중국 하북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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