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의 술] (1) 물 좋아 으뜸이었던 '주도' 마산

옛 경남 마산은 한때 물 좋기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당시 무학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수질이 우수했다고 전해진다. 맑고 깨끗했던 마산 지하수는 바다 건너 일본인 눈에도 들었다. 이들은 마산이 청주를 양조하기에 적합한 곳임을 직감했다. 일제 강점기 마산에 청주 공장 10여 개가 들어서면서 마산은 '주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질을 자랑했던 물도, 그 많던 청주 공장도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마산이라는 이름 또한 현재는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라는 행정명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찬란했던 옛 '주도 마산'을 기억하는 이도 점차 나이를 먹어간다. 더 늦기 전에 그 기록과 보존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주도 마산의 태동 = 1904년과 1905년에 걸쳐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한국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 지배권을 한층 더 강화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 상인들이 마산포 곳곳에 자리를 잡는다. 마산포에 식민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가운데 근대 공업에 눈을 돌린 이들은 청주 공장을 세운다.

옛 마산에 청주 공장이 처음 들어선 때는 1904년이다. <마산시사>를 보면, 마산 최초 주조장은 아즈마 다다오가 세운 '아즈마 청주양조장'이다. 이후 1905년 11월 현 마산합포구 서성동에 이시바시 주조장, 1906년 10월 현 마산합포구 장군동에 고단다 주조장, 같은 해 11월 현 마산합포구 청계동에 나가다게 주조장이 차례로 들어선다. 개항기에만 마산에 들어선 일본식 청주공장이 7개였다.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덕천상가아파트 자리에 있던 대증주조장. /허정도와 함께하는 도시 이야기

이보다 앞서 1883년 1월 일본인들은 부산에 청주 공장을 세웠다. 마산은 인천·서울 등과 함께 후발 주자로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마산은 금세 부산을 따라잡는다. 일본 청주 생산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는 국내를 포함, 일본까지 수출됐다.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는 '마산주'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그 맛이 좋았다고 한다. 다음은 마산 청주 명성을 가늠할 수 있는 설명이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출간한 <조선>이라는 잡지에 '경남의 특산'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에서는 당시의 경상남도 특산으로 일본 청주를 가장 먼저 꼽았다. '청주 : 본 도의 청주 양조업은 기후·풍토·수질의 천혜에 우수한 원료미를 산하기 때문에 기 품질이 일본 명양주를 능가하고 연산액 역 2만 석 이상에 달하야 선내는 물론 멀리 만주에 수출되야 도처에 명성이 높은데 주요 산지는 부산·마산이다.'(주영하 저 <식탁 위의 한국사> 가운데)"

과거 마산에서 생산되었던 청주 술병. /허정도와 함께하는 도시 이야기

◇정종은 상품명? = <식탁 위의 한국사>를 보면,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가 일본에서도 유명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호소이 이노스케가 편찬하고 조선주조협회에서 발행한 <조선주조사>에 벚꽃으로 유명한 마산에 '마산주'도 있어 좋다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지방은 기후도 온난하여 물도 상당히 좋은 곳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청주의 양조를 시험해보고 소위 조선의 고베 나다 지방에서 나는 고급 청주로 알려지게 됐다. 또한 감히 나다의 명주보다 더 좋은 맛을 내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조선 청주의 발상지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책에서 설명하는 <조선주조사>에는 일본 청주를 생산하는 마산의 대표적 공장이 10곳이나 소개된다. 해당 공장에서 생산된 일본 청주는 일본식 이름으로 판매됐다. '정통불정종' '빈학' '미생' '한목단' '계림' '대정앵' '대전정종' '염록' '달의 포구' '아침의 나다' '앵정길' '소나무의 색'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잠깐 재미있는 사연을 소개한다. 최근 국내에서 일본 청주를 부를 때 쓰는 '사케'라는 명칭은 일본어 술(酒) 자를 훈독으로 읽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세이슈' 등으로 불린다.

국내 일부에서는 아직도 일본 청주를 '정종'이라고 부른다. 사실 정종이라는 명칭은 상품명이다. 마산에서 생산되기도 했던 일본 청주 '대전정종'이 그 주인공이다.

앵정길을 생산한 곳은 쇼와주류주식회사이다. 이 회사는 일본 고베 나다 '야마무라주조'가 마산에 세운 것이다. 야마무라주조 대표였던 야마무라 다자에몬은 새로 개발한 청주 이름을 고민하다 한 불교 경전을 보게 된다. 불교 경전 이름은 '임제정종(臨濟正宗)'. 정종(正宗)을 일본어 음독하면 청주의 그것과 같은 '세이슈'가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종의 훈독인 '마사무네'를 사용했고, 마사무네로 불리는 것이 고착화했다. 나중에 야마무라주조는 마사무네를 독자 상표로 등록하려 했지만, 많은 양조장에서 마사무네를 많이 쓰는 시점이라 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야마무라주조는 '사쿠라마사무네'로 상표를 등록한다.

2011년 철거된 삼광청주. /김구연 기자 sajin@

◇청주 사라지고 희석식 소주 등장 = 1938년 마산 청주 생산량은 2만 석을 넘는다. 1920년 4400석에서 5배 가까이 늘어났다. 1920년 부산 청주 생산량은 6300석으로 마산보다 많았다. 1926년 마산 생산량이 7400여 석으로 늘었지만 부산 생산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1928년 마산 청주 생산량은 1만 1000석을 기록하면서 부산 생산량(1만 석)을 넘어선다. 국내 청주 생산량 1위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해방 이후 마산 술 역사는 변화를 맞이한다. 미군정청은 일본인 재산을 모두 적산으로 분류, 한국인에게 넘긴다. 마산에 있던 13개 청주양조장도 한국인 손에 넘겨진다.

이학렬 씨가 쓴 <간추린 마산역사>를 보면, 당시 미군정청은 청주 공장을 일본인 소유일 때 일하던 이들이나 경영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맡겼다. 이들은 2~5명씩 공동관리단을 만들어 운영했다.

한국인 관리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상호 변경이었다. 하라다 주조장은 동화주조, 무라사기주조는 염록주조에서 다시 백광주조로 탈바꿈했다.

이름은 변했지만 운영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해방 후 식량난으로 청주 양조에 사용되는 쌀도 제한이 있었다. 이들은 단속을 피하고자 '개량 약주'를 팔기도 했다. 술 빚는 기술이 서툴러 공장 관리권이 넘어가는 일도 있었다. 질 낮은 청주가 시중에 나돌았고, 청주 생산량은 한 달 평균 5000석 정도를 기록했다.

1960년대 마산역 앞에 있던 조해주조 공장.

청주는 1968년 주세법 개정으로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청주는 이때 종량세에서 종가세 대상으로 바뀐다. 주세가 오르면서 가격이 올랐고, 값이 비교적 비싼 정종은 수요가 점차 줄어든다.

마산 청주 업계도 이런 이유로 결국 1970년대를 넘기지 못했다. 1962년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한목단 양조장이 새로 생기는 등 부활을 노렸지만, 1973년 정부의 통합 조치로 마산에는 백광양조장만 남게 된다. 백광도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을 닫는다. '주도 마산'을 대표했던 일본 청주 제조 역사가 뒤안길로 사라지는 대목이다.

비슷한 시기 주류 시장에서는 값이 싼 희석식 소주 수요가 증가한다. 마산에서는 지금의 무학(옛 무학주조주식회사)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65년 무학 창업주 최위승 씨가 적산인 야마무라 주조회사를 인수, 희석식 소주 '무학'을 생산, 판매하게 된다.

※이 기획은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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