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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셀카]영화학도 박진슬 씨의 스무 살

문학도 꿈 키우던 열일곱 살 때 김연수 소설 <스무살>속 문장 이해 못하고 무심코 넘겼던 나
3년 후 대학 영화과 진학한 현재 서툴고 치열한 타지 생활하며 진정한 스무 살 의미·가치 깨달아

박진슬 webmaster@idomin.com 2016년 08월 29일 월요일

지난해 11월 18일 자 <행복한 셀카>에 창원시 성산구 안민동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 박진슬 양의 이야기가 나간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평생 하고 싶은 일을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영화라고 대답할 거예요." 이렇게 시작한 글에는 자신이 어떻게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됐고, 영화감독을 꿈꾸게 됐는지 솔직하고 담담한 마음이 담겨 있었지요. 주변에서는 영화를 해서 어떻게 먹고살 거냐고 걱정해도,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서만 사는 건 아니라며 당당하게 말하던 친구였습니다.

최근 박진슬 씨가 근황을 전해왔습니다. 무려 서울예술대학교 영화과에 입학했다는군요. 수많은 연예계 거물들을 배출한, 문화예술 쪽에서는 굉장히 인정받는 학교라고 합니다. 영화학도로 한 학기를 마친 진슬 씨가 스무 살을 맞은 자신의 심정을 글로 써 보내왔습니다. 생각보다 힘들었던 객지 생활, 학과 생활도 담겨 있네요. 무엇보다 세상과 사회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이 진지해서 기특하고 흐뭇한 마음이 듭니다. /편집자 주

3년 전 그러니까 열일곱 살 때, 난 문예창작과에 가길 꿈꿨다. 글 쓰는 게 좋았고 남들 앞에 내세울 게 그거 하나뿐이었다. 당장에 할 건 없고 하루빨리 입시를 시작하고 싶어서 수소문 끝에 당시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3학년이던 한 언니에게 인터넷으로 입시과외를 받았다. 하지만, 과외는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나 스스로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의욕이 앞섰던 나에 비해 언니의 수업은 다소 여유롭고 힘이 빠져있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창원 여고생이 올해 서울예대 영화학과에 입학해 한 학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박진슬 씨.

3년 뒤인 올해 나는 문예창작과는 아니지만 언니와 같은 학교의 영화과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언니가 언젠가 다녀갔을 학교도서관에 앉아서 김연수의 소설 <스무살>을 읽었다.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고 저희끼리만 저만치 등 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소설 공부를 하던 고등학생 당시에는 이 문장이 와 닿지 않았다. 스무 살은 아직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지나간다'라는 그 표현이 그저 무심하고 심심하게 다가왔다.

2016년 내 스무 살은 힘겨운 대학 입시를 거쳐 처음으로 타지 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낯선 생활환경 탓인지 1학년 1학기 내내 난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거나 의욕이 없었다. 예전처럼 뭔가를 늘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었지만 매 순간 닥쳐오는 평가의 잣대들에 매일같이 무너져 내렸고,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 때도 내가 어떻게 평가당하게 될지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마치 소멸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뭔가를 계속 해내려고 했다.

스무 살의 절반을 넘어온 지금, 소설 첫 문장의 '지나간다' 라는 표현에 이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힘들고 외로운 시간은 빨리 극복하고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외롭고, 뭘 하든 서툰 나 자신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남몰래 눈물 흘린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성숙하게 하여주었던 것 같다. 충분히 외로웠고 충분히 서툴렀기에 한 달에 한 번 남짓 가는 창원 고향집에 가도 예전보다는 덤덤해졌고, 엄마와 아빠가 꿈에 나오는 일도 잦아들었으며, 아직은 서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저렴하게 장을 보는 방법을 터득했다. 서먹하기만 했던 룸메이트가 이제는 정말로 가족이 되었고, 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하게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스무 살은 정말로 곧 지나갔다. 지나간다는 표현은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결국 거쳐 가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뿐더러, 헛된 시간은 없다는 의미였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그 감각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3년 전 내게 소설을 가르쳐 주었던 20대의 그 언니는 내가 그 당시 지니고 있던 '열일곱의 하늘과 열일곱의 바람과 열일곱의 눈빛'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곧 지나갈 열일곱만의 세계를 지켜준 것이다.

결국, 나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로 그렇게 흘러들어갔지만 고등학교 내내 문학과 글을 사랑해왔다. 지금까지도. 생각해보면 그때 그 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안에 문학은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개강을 맞이하며 또다시 집어든 김연수의 <스무살>을 읽으며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일을 하든 맞서 싸우기보다는 천천히 지나가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독자 여러분의 셀카와 사연을 받습니다. 사연은 일기나 편지도 좋고, 마음에 드는 글귀도 좋습니다. 셀카가 지면에 실린 분에게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셀카는 휴대전화 메시지나 메일로 보내주세요. 이서후 기자 who@idomin.com 010-9021-2508.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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