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어민의 삶] (1) 1987년 들어선 하굿둑

이 나라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려 하지 않는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며 이래저래 손을 대고 파헤친다.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또한 예외는 아니다. 30여 년 사이 하굿둑 조성, 4대 강 사업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주민 또한 그에 따른 부침을 겪고 있다. 40년간 낙동강에서 살아온 김무생(69·김해시 상동면 매리마을) 씨를 통해 여기 주민들 삶을 3회에 걸쳐 들여다본다.

김무생 씨는 김해시 서부동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지나서 외항선 선원으로 외국을 오갔고, 그 사이 김해 상동면 매리마을 여인을 만났다. 1977년 29살에 결혼하면서 매리마을 처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는 곧 '낙동강 삶'의 시작이기도 하다.

처가에서는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외항선 생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마침 장인은 배 한 척을 두고 낙동강에서 고기를 잡아오던 터였다. 외항선 일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같은 뱃일이기는 했다. 큰 거부감 없이 장인의 배를 물려받으며 낙동강 어민이 되었다.

"그때는 낙동강 조수 간만의 차가 엄청 심했지. 물 빠지면 여기 전부가 하얀 모래사장으로 변했으니까. 지금 하동 섬진강 재첩이 유명하다지? 아이고, 그때는 여기 낙동강이 재첩 밭이었어. 요즘 거랑 종류가 다른 노랑조개(개량조개)가 유독 많았지. 거랭이(손틀방)를 배에 걸어 바닥을 긁으면 재첩이 엄청나게 올라와. 유독 대구 사람이 좋아해서 그쪽으로 대부분 팔아넘겼고, 일부는 일본에 수출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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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상동면 매리마을에서 40년째 낙동강 어민으로 살아오는 김무생 씨. 그는 남은 배 한 척을 언젠가는 완전히 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남석형 기자

잉어·붕어는 말할 것도 없고, 장어·진기미(새우)·참게, 여름철에는 황복어도 올라왔다. 빛깔이 좋아 껍데기를 가구에 사용하는 손바닥 크기만 한 대치 조개도 많았다.

재산을 축적할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자녀 공부시키고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1982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낙동강 하굿둑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부산 사하구 하단동과 강서구 명지동 사이를 잇는 거대 둑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식수·농공업용수 확대, 염해 방지, 교통 개선, 주변 개발 등이 목적이었다. 사실 이미 1970년대부터 조용히 진행되던 것이 전두환 정권 들어 본격화됐을 뿐이다.

부산 을숙도 주민은 어업 타격 등에 대한 우려로 크게 반발했지만, 여기 사람들은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라며 받아들였다. 오히려 기대감이 컸다. 김 씨는 그때 나라에서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굿둑이 들어서면 어업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도 있었지. 그런데 하굿둑을 설계한 교수님이 분명히 말했어. '완공되면 고급어종이 더 증가한다'라고 말이야. 배운 것 없는 우리야 철석같이 그 말을 믿었지…."

1983년 공사에 들어가면서 일부 어민은 나라로부터 보상금을 일정 부분 받았다. 김 씨도 마찬가지였다. 주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때는 돈 성격을 잘 알지 못했다. 피해 보상금이라는 것을….

그렇게 1987년 11월 하굿둑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수문이 닫히다 보니 조수 흐름이 없어졌다. 민물과 짠물이 섞인 곳에 서식하는 재첩은 곧 모습을 감췄다. 장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변화가 오기까지 불과 2년도 안 걸렸다. 그렇다고 다른 어종이 새로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어민들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나마 잉어·붕어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에 희망을 뒀지만, 이 또한 한 해 두 해 갈수록 줄어들었다. 더 이상 어업만으로는 생계가 불가능했다.

"나는 땅이 조금 있어서 젖소·돼지를 키우기 시작했지. 낮에는 젖을 짜고, 풀 구하러 여기저기 다니는 거야. 밤 되면 강에 그물을 놓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일어나 걷어오는 거지. 먹고살고자 몸부림치는 거야. 그래도 40대라 젊었으니 힘든 줄 모르고 했어. 그런데 젖소 파동을 겪으면서 이마저도 힘들어졌고…. 그러니 어떡해. 횟집을 열고, 산딸기 농사도 조금씩 하고 그랬지."

그래도 김 씨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누군가는 막노동 일을 하거나,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주며 생활했다.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뿌리박고 살아온 낙동강을 쉽게 버리지는 않았다.

"하굿둑이 여기 주민들 삶에 큰 타격을 준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나라에서 일부러 어민을 죽이려고 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거야."

여기 사람들은 하굿둑 완공 후 20여 년을 그렇게 버티며 살아갔다.

그런데 2007년 대선을 전후로 대운하 혹은 4대 강 사업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때는 자신들에게 지금과 같은 대재앙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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