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리안 '또 다른 폭력'씁쓸하지만...우리사회 여성 향한 차별·폭력 되짚어야

며칠 전 집 앞 밤길을 걷다 예쁘게 생긴 길고양이 한 마리를 보고는 가까이 다가가 쓰다듬었다. 처음엔 얌전하던 고양이가 목 부위를 만지는 순간 돌변해 팔을 할퀴었다. 상처가 깊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피가 났고 금세 쓰려 왔다. 아내는 고양이에게서 나쁜 병원균이라도 옮을까 걱정했다. 그때 딸아이가 말했다. "고양이가 사람에게 학대를 받았나 봐. 무서워서 그랬을 거야."

아이 말을 듣고 요즘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메갈리아와 페미니즘 논쟁이 떠올랐다. 억압받는 약자들이 선택하는 '저항'과 그것의 '폭력성'에만 확대경을 들이대고 몰매 때리는 우리 사회 주류의 행태도 오버랩됐다.

약자의 발톱을 조명하려면 똑같은 크기의 카메라를 강자의 이빨에도 갖다대야 한다. 시위대의 쇠파이프를 비추려면 경찰 진압봉과 최루탄을 먼저 비춰야 하고, 테러리즘을 비난하기에 앞서 석유자본의 수탈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쏟아붓는 폭탄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5·18 항쟁 때 시민군이 무장한 카빈소총도 그것만 보면 살상무기지만, 계엄군이 무장한 엠16과 탱크에 비하면 나약한 방어수단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메갈리안의 폭력성을 조명하려면 차별과 폭력에 고통받는 여성들의 삶과 한국의 후진적인 젠더 인식 수준을 먼저 살펴야 한다.

미리 밝혀 두지만 나는 메갈리안이 아니다. 요샛말로 '히트'가 된 메갈리안 사이트도 글 쓰기 전에 잠깐 들렀을 뿐이다. 솔직히 언론이나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논평과 게시글 읽어 내기에도 벅차다. 메갈리안에 대한 주요 논란은 '소녀는 왕자가 필요 없다'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성우가 계약 해지된 사건이 여성혐오인지 아닌지, 메갈리안이 페미니즘 운동인지 아닌지, '미러링'이라는 폭력 되돌려주기식 반격이 또 다른 폭력인지 아닌지 등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논란보다는 약자의 폭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더 관심이 간다. 여러 증거들로 볼 때 메갈리안 유저들이 우리 사회 또 다른 약자를 비하하거나 조롱하며 폭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에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을 두고 '탈김치'(사망하여 탈조선한 김치남) 운운하며 조롱한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이 '강남역 살인 피해여성을 조롱한 일베를 미러링한 것'이라 말하는 것은 너무 궁색한 변명이다. 그 밖에도 메갈리안이 가난한 남성을 비하하며 '돈 없으면 연애시장에 나오지도 말라'고 하면서도, 부자나 '갓양남'(김치남보다 뛰어난 서양남)을 미화하는 포스팅은 수없이 많다.

'운동'이란 사회와 동떨어져 작용하는 힘이 아니라 그 사회가 성장하며 겪는 '성찰' 과정이다. 그렇다고 모든 운동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은 폭력적인 군사정권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지만, 군대문화와 중앙집권적 성향, 가부장적인 모습을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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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말뜻처럼 계속 살아 움직이려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 유례없이 강력한 언어로 공격적인 페미니즘을 실현하며, 고루한 '한남충'들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작은 파열음을 내는 메갈리안이 또 다른 약자를 해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그러나 모순과 한계가 있더라도 운동체가 이룬 성과까지 부정해선 안 된다. 여성 참정권 운동체였던 '서프러제트'는 시발지인 영국에서 인종차별 문제에 둔감했고, 미국에서는 흑인 여성의 참정권에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프러제트는 여전히 민주주의와 페미니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메갈리안으로 상징되는 공격적인 페미니스트들이 꺼내 든 '미러링'이란 무기는 정조준되지 못하고 다수에게 난사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무기는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과 폭력·혐오범죄에 비하면 상처입은 길고양이의 발톱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남충들이여, 그들의 반격에 세상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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