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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귀하신 몸' 전복…타지서 사서 임금님께 바쳐

[신우해이어보] 23편…전복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webmaster@idomin.com 2016년 08월 09일 화요일

연일 무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절기상으로는 중복도 넘기고, 엊그제가 입추이긴 하나 아직 삼복더위 속에 있으니 더울밖에. 특히 올해는 이상 고온으로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무더운 여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해서 이번에는 현장 탐방을 보류하고, 요즘 어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보양식 전복을 소개할까 한다.

지금이야 양식 전복의 보급으로 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재료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민 대중들에게는 노약자나 환자의 영양식 정도로만 여겼을 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전복을 맛본 때가 언제였는지조차 알 수 없다. 녀석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 부뚜막에 누룽지 긁개로 쓰던 전복 껍데기로 떠오른다. 그렇지만, 그 껍데기가 나나 우리 가족이 먹고 남긴 녀석의 유체인지는 증명할 수 없다. 그만큼 귀했다는 이야기다. 요즘이야 수산시장이나 대형마트의 수산코너에서 아니면 택배를 통해서도 무시로 싱싱한 전복을 구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무척 귀하신 몸이었다.

마산어시장에 나온 자연산 전복. /최헌섭

요즘 우리 식탁에 오르는 녀석들은 대부분 제주도와 완도 등지에서 미역과 다시마를 먹여 키운 것이다. 예전부터 전복은 우리나라 전 해안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환경 변화와 남획에 따른 개체수의 급격한 감소로 자연산은 주로 울릉도나 제주도 근해에서만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자연산 전복은 채취할 수 있는 성체가 되기까지 몇 년을 바다에서 산 녀석들이기 때문에 등껍데기에 굴 따개비와 같은 조개류와 많은 해조류가 붙어 있고, 등 색깔은 자주색에 가까운 검붉은 색을 띤다. 이에 비해 양식산은 껍데기가 상대적으로 매끈한 편이며 색깔은 푸르스름하여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전복은 <우해이어보>에는 복(鰒), <현산어보>에는 복어(鰒魚), <전어지>에는 생복으로 나온다. 담정 김려는 <우해이어보>에서 이렇게 적었다.

"전복도 조개 종류다. 전복 껍질의 색깔도 조가비 색깔과 같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복 껍질을 가짜 조개라고 한다. 전복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어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살아 있는 것을 생포(生包)라고 하고, 말린 것을 전복(全鰒)이라고 한다. 포는 방언으로 전복이라는 말이다. <한서> 왕망전에서 전복을 먹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갈비찜 재료로 활용되는 전복./최현섭

이 글에서 왕망이 전복을 먹었다고 하는 고사는 전한에 이어 신(新)을 세운 왕망이 건국 스트레스로 입맛을 잃자 병서를 읽다가 술과 전복만을 겨우 먹었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현산어보>에는 조조도 전복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에게 한 주(州)에서 바친 양이 겨우 100마리뿐이었다고 하니 그것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 알 만하다.

전복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먹어온 귀중한 식료품이다. 선사시대 이래의 조개더미(패총)에서도 그 껍데기가 출토되고 있고, 고려 조선시대의 자료에도 전복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 전한다.

하지만 산출량은 많지 않았던 듯하다. 부산 영도구 동삼동 조개더미 제4~5문화층(기원전 2500~기원전 1500년)이나 통영 연대도 조개더미 등에서 출토된 양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분야 연구자들의 이야기로는 출토 빈도는 낮지만 거의 모든 조개더미에서 전복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어떤 조개류보다도 먹을 수 있는 살이 많고 맛도 좋은 전복이 그리 많이 출토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껍데기를 다른 자원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조개더미에서 덜 출토되는 것인지, 그것은 앞으로 더 따져 볼 일이다.

조선 후기 전국 읍지를 모아 만든 <여지도서>(1757~1765) 중 진해현 물산편에는 이곳에서 전복이 난다고 실려 있다. 그런데 담정이 진해현에 유배오기 직전의 상황을 전하는 <정조실록>에는 창원부와 그에 딸린 웅천 진해 등지에서는 전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조실록> 23년(1799) 4월 19일 기사에 창원부사 이상도가 상소하여 공납하는 토산물을 다른 곳에서 사서 바치는 폐단에 대해 경상도 관찰사 신기가 올린 장계를 보자.

"(전략) 전복 한 종류에는 도내에서 봉진하는 것이 대부분 제주의 장사치에게서 사 와서 사천에서 파는 것입니다. (중략) 창원·김해·하동·고성·남해·웅천·진해·칠원은 원래 나는 것이 없습니다. (후략)"

이로써 보자면 <여지도서>의 기록은 앞서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전한 것일 가능성이 크므로 경상감사가 올린 장계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우해이어보>에도 전복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직전의 사정을 전하는 <정조실록>에 남해 연안에서 전복이 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당시 이곳 우해를 비롯한 남해 연안에는 전복의 양이 급감하여 간혹 잡히기는 하나 공납할 물량이 절대 부족하여 제주산을 사천에서 사서 올렸다는 이야기다. 이런 사정을 전하는 시기가 조선의 부흥기라 불리는 영·정조시대의 이야기이고 보면, 그 앞뒤로 이런 폐단에 당시의 민초들이 겪었을 고충이 어떠했을까 짐작된다.

전복은 삼계탕 등 영양식 재료로 많이 활용되었다. 날것으로 도 즐겨 먹는다./최헌섭

담정은 기와전복(와복·瓦鰒)도 소개한다. "전복 중에는 기와전복이 있다. 껍질이 둥글고 크기는 쟁반만 하다. 껍질의 등 쪽은 자줏빛을 띤 검은 색이고, 기와지붕 같은 골이 있다. 껍질 안에는 모두 흰색이라 조가비 색깔이 나지 않는다. 맛은 전복과 비슷하지만 전복보다 더 낫다."

이름이 기와전복인 것은 껍데기에 기와지붕 같은 골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전복은 옛 기록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담정의 설명처럼 껍데기가 둥글고 크며 색깔이 자흑색인 것이라면, 말전복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기와전복이란 이름은 등에 생긴 기왓골에서 비롯한 것이고, 지금 이름인 말전복은 그 몸집이 크기 때문이다. 말은 중심 또는 으뜸을 이르는 우리말이니 참고할 만하다. 말전복은 다 자랐을 때 몸길이가 25㎝에 이를 만큼 크며, 한자 이름이 '대야처럼 큰 전복'이란 뜻의 '반대포'인 것도 기와전복이 쟁반(槃)만 하다고 한 사실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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