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물은 배설한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묵은 것은 버리고 비운다. 가장 비우기 힘든 것은 한이다. 암의 씨앗이기도 하다. 사람은 마음의 독을 배설하기 위해 온갖 방법에 기댄다.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마약에 묻지마 살인까지. 한을 배설하지 못한 나약한 인간은 사회악이란 무덤을 만든다. 운동이나 종교에 기대는 것은 한 수 높은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이다. 그 정점에 고수들이 찾는 시가 있다. 시는 카타르시스(catharsis), 즉 감정의 정화 작용이다. 실컷 울고 나면 후련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시는 현대인 모두가 배워야 할 맨손체조와 같은 것이다. 가슴으로 손끝으로 풀어낸 한이 숙성과정을 거쳐 시로 태어나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한다. 시는 어둡고 더러운 세상을 정화시키는 빛과 소금이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도 시는 있었다. 사람들은 희로애락을 표현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만들었고 노랫말들은 바람에 날리는 경판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다. 문자가 생기고 나서 사람들은 노래를 적기 시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몇 천 년이 지나 시는 피에서 피로 이어져 모든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자리 잡았다. 언제 어느 별에서 시작되어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태생적 노마드를 주체할 수 없어 바람처럼 떠도는 사람들의 마음이 곧 시다.

시는 언제 쓰는가? 시는 견딜 수 없이 아플 때 쓰는 것이라 했다. 시대가 암울할수록 시는 더 빛난다. 지금은 태평시대, 저항의 타깃을 잃어버린 시는 배부른 대중의 버림을 받았다. 그렇다고 한 줄 시를 위해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진표율사처럼 만신창법을 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길을 나섰다. 다른 세상에 대한 경험이 절실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탕과 게으름에 길들여진 몸으로 시를 찾아 나서는 것은 위선의 극치이자 영혼의 그림자놀이일 뿐이다.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입과 손과 가슴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방황하는 시를 붙들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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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좇지 않는다. 문득 꿈을 꾸듯 아슴아슴하게 맴돌며 다가오는 시를 느낄 때가 있다. 그 한 방울의 종자를 받아 오래 묵히면 잘 익은 젓갈처럼 시간의 녹이 나고 간장독에 피는 꽃가지 같은 이름 하나 얻는다. 그래서 틈 날 때마다 그물을 깁는다. 잠이 깨기도 전에 순식간에 시가 빠져 나갈 수 있기에 보다 더 촘촘하게 어휘를 엮고 은유를 덧대 온전히 살아 펄떡거리는 한 줄의 시를 받는다. 이제 길을 나섰으니 슬픈 이야기는 잊어야겠다. 혼자 노래하고 스스로 그 노래에 취하는 서정 시인이 되어야겠다. 독자가 없는 시인, 혼자 즐기는 시인 말이다. 시의 날개로 시공을 유람하다보면 나의 방황은 마침내 안식에 이를 것이다. 가치 있는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김경식(시인·중국 하북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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