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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할 땐 아득하더니…드디어 순례길 절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21편

박미희 webmaster@idomin.com 2016년 07월 19일 화요일

7월 7일 카리온∼테라리요스 17.5㎞ 어마어마한 평야와 수확 작업

오늘은 거리가 짧아서 서두르지 않고 메세타를 즐기며 걸었어요. 정말 광활한 평야들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어마어마한 콤바인이 밀을 수확하는 것도 보았는데 우리나라 수확 풍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네요. 중간 중간 나무 그늘이 있어서 쉴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쩐 일로 늘 저보다 늦던 프랭크 부자(순례 초반부터 자주 마주친 미국인 아버지와 아들)가 제가 쉬고 있는데 저를 앞질러 갑니다. 어제 피터(아들)가 배탈이 나서 프랭크가 수프를 끓여 주던데 아마 그걸 먹고 힘이 난 걸까요?

가르마를 탄 듯한 길을 따라 함께 걷다 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바르(bar)가 나왔어요. 무인지대라더니, 더욱 반갑네요. 이제 3.5㎞가 남았는데 날이 더우니 좀 지루하네요. 아직 테라리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Templarios) 마을로 들어온 것 같지 않은데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가 나왔어요. 그런데 너무 황량해 보여요. 그래서 조금 더 걸으니 마을 안에 또 알베르게가 나오더라고요. 큰 맘 먹고 좀 비싼 방을 선택했어요. 오늘은 좀 쉬어 볼까 하고요. 1층 침대만 4개 있는 방이었어요.

메세타를 지나는 순례자

혹시 슈퍼가 있나 하고 산책 겸 나가봤는데 정말 날씨가 머리가 벗어질 듯이 덥기만 하고 슈퍼가 없었어요. 알베르게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살 수가 있어서 다음 날 먹을 과일을 좀 사긴 했어요.

알베르게에 샘이 있었는데 얼마나 물이 차가운지 모두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담그는 거예요. 저도 따라서 해 보았더니 정말 시원해서 발의 피로가 모두 달아나는 듯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프랭크의 발을 보니 완전히 엉망진창이었어요. 어떻게 그 발로 걷는지 신기할 정도였다니까요. 많은 사람이 심하게 아픈 몸을 끌며 걷기를 멈추지 않는데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아요. 저의 경우라면 포기를 했을 법도 한데 다행히 조금 생기던 물집도 가라앉았고 특별히 심하게 아픈 곳이 없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테라리요스 거리

오늘 같이 걷던 프랑스 신부님도 같은 알베르게라서 신부님이 집전하시는 미사를 함께 하고 한국인 아가씨 세 명과 함께 식사를 했어요. 수다 떨며 먹으니 더욱 맛이 있네요. 이 아가씨들은 잘 다니던 직장을 다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나왔대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으로 앞으로 1년 정도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더군요. 그 용기에 감탄을 했고 또 부럽기도 했어요.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까요? 또 다른 꿈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디서 근사한 소리가 들렸어요. 집시 복장을 한 사람이 피리를 불고 있었고 젊은 아가씨가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아주 멋지더라고요. 피리 부는 아저씨는 주변 사람을 모아 이것저것을 주며 두드리라 하는데 그 소리 또한 듣기 좋았어요. 즉석에서 작은 콘서트가 열린 거예요. 이것이 바로 카미노의 매력이기도 하지요.

테라리요스 알베르게 순례자들의 즉석 콘서트

7월 8일 엘 부르고 라네로까지 30㎞ 반은 해냈다! 희열과 뿌듯함

새벽 4시쯤 나와 준비하고 있으니 한국 아가씨 중 한 명도 준비를 하러 나오네요. 같이 콘플레이크로 아침을 먹었는데, 한 명이 몸 상태가 안 좋아 준비가 늦어지겠답니다. 난 준비가 일찍 끝나서 길을 나섰어요. 환해지기 시작하면서 내 페이스로 걷기 시작합니다. 빨리 걷는 게 덜 피곤하더라고요. 다른 사람과 보조 맞춘다고 천천히 걸으면 더 힘이 든 거예요.

이곳의 풍경은 또 다르게 펼쳐지네요. 멋진 해바라기들이 얼마나 장엄하게 서 있는지 황홀했어요. 요즘 계속 밀밭만 보아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동트는 해바라기밭과 하늘의 조화가 정말 그림 같았어요.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음이 너무 아쉬웠지요. 그런데 좀 쉬고 싶은데 문을 연 바르(bar)가 없는 거예요. 거리를 잘못 계산한 건지 어찌하다 보니 사하군(Sahagun)까지 13㎞를 쉬지 않고 걸어와 버렸어요!

작은 도시 사하군에 있는 순례길 절반 지점 표지 앞에서

사하군은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 중 절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소도시예요. 시작할 때는 언제 끝날지 아득하기만 하더니 절반이라니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기쁜 마음에 절반이라는 표지가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 바르가 있는 곳을 물어보니 거꾸로 다시 가야 한다는군요.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은데 어쩌라고요~! 하는 수 없이 길가의 벤치에 앉아 비상식량으로 배를 채우고 남편과 딸에게 전화해서 어리광도 피우고 나니 좀 힘이 생겼어요.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앞뒤로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리 혼자 걷는 걸 좋아해도 그렇지 이렇게 몇 시간을 혼자 걸으려니 죽겠더라고요. 분명히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데 뒤에 오는 사람들과 만나려고 일부러 천천히 걷고 오래 쉬었다 가 봐도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들이 안 보이니 발은 무겁고 지루하고 더 피곤해집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생소한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란 곳이 나타나네요. 일단 바르가 보이기에 무조건 들어갔죠. 거기서 배부르게 챙겨 먹고 앉아 있으니 그제야 아는 순례자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중간에 갈라지는 길이 있었는데 그걸 못 보고 지나쳐 왔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결국 조금 더 걸어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라는 곳까지 와서 묵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30㎞를 넘게 걸어오게 된 거랍니다.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덥지 않아 다행이었어요.

엘 부르고 라네로의 멋진 알베르게

알베르게를 찾았는데, 아주 좋아요! 주인아저씨는 나름 멋쟁이같이 특이하게 차리고는 있는데 영어는 일부러 안 하는 건지 스페인 말로만 하니 답답했지만(무슨 말로 해도 답답하지만) 그래도 부엌도 있고 마당도 멋지고 일단 만족입니다. 씻고 마당의 파라솔 아래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네요.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어주니 오늘의 노고가 살랑살랑 날아갑니다. 

파라솔 그늘에서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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