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혼인 보며 애비는 부끄러웠단다…며느리이자 고마운 딸 영미야 사랑한다

영미야,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무어라 불러야 하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며느리는 '아들의 아내', 자부(子婦)는 '며느리'라고 나와 있더구나. '그럼 앞으로 무어라 불러야 서로 편할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혼인식 전에 부르던 대로 '영미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앞으로 불러주면 좋겠다는 이름이 있으면 말해 주렴.

영미야, 너는 우리 집 며느리이기 전에 어느 집안의 '소중한 딸'이다. 아니지, 어느 집안을 따지기 전에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런 마음으로 '영미야!' 하고 부를 테니 너도 여태 불렀던 것처럼 그냥 아버지라 불러주면 고맙겠구나. 더구나 우리 집엔 딸이 없으니, 너는 보물 가운데 가장 귀한 보물이다.

영미야, 산골 마을 할머니들이 가끔 하시는 말씀인데 말이야. "여자는 철이 들면 시집을 가는데, 남자는 철이 들면 일찍 죽어." 너도 시집가서 살아보니 딱 맞는 말씀인 거 같지?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늘 철이 없어 보이거든. 어쨌든 고맙다, 영미야. 네가 우리 아들과 혼인식을 올린다고 했을 때, 네 시어머니가 될 내 아내는 걱정이 태산 같았단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걱정은 아들 녀석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너와 한평생 같이 살려면 어려움이 많을 텐데, 그 어려움을 잘 견뎌 나갈 만큼 뿌리가 깊지 않다는 것이다.

속맘을 솔직히 털어놓고 말하자면 아내 마음속에는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이런 못난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단다. '세상에 건강한 아가씨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내 아들이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아가씨와 혼인을 한단 말인가.' 이런 못난 생각을 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마땅히 건강한 사람이 장애인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런 못난 생각을 했으니 무어라 할 말이 없구나.

영미야, 네가 장애(녹내장)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단다. 고등학교 때, 몸에 맞지 않은 항생제가 들어 있는 감기약을 먹고 온몸에 열이 나, 그 열로 말미암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니…. 왼쪽 눈은 시신경이 다 죽어 아예 보이지 않고, 오른쪽 눈마저 하얀 막을 친 것처럼 흐릿하게 보인다니…. 그래서 계단을 내려올 때는 계단이 모두 평지로 보여 누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안된다니….

지난달에 너희들이 혼인식 날짜를 정했다고 알려 왔을 때도 믿고 싶지 않았다.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나 아주 깊은 산골, 학생이 없어 폐교된 지 오래된 운동장 모퉁이 풀숲에서 너희들이 혼인식을 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부질없는 욕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단다.

영미야, 혼인식 날 말이야. 네가 4만 원 주고 손수 마련한 드레스 참 아름다웠다.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나온 신랑(아들 녀석) 옷도 참 편안하게 보였다. 더구나 친구들과 너희들이 손수 마련한 식장(풀숲)과 김밥과 국수도 참 맛있었다. 더없이 맑은 하늘만큼이나 참석한 손님들도 눈부셨다. 경조비도 예물도 주고받지 않고, 그 흔한 청첩장도 만들지 않고, 부모한테 무엇 하나 기대지 않고, 너희들 스스로 혼인식 날짜를 잡고, 음식을 준비하고, 온 마음으로 축하해 줄 사람만 초대하여 소박하게 올린 혼인식을 보면서 이 애비는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돈과 편리함에 물든 이 애비는 '쓰레기문화'에 젖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조차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입만 살아서 농부니 시인이니 떠벌리고 다녔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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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야, 사랑하는 우리 딸아! 혼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단다. 우리 딸, 장하구나! 늘 피곤하고 흐릿한 눈으로 집안에서 쓰는 베개며 살림살이까지 손수 만들고, 여러 가지 액세서리와 초까지 만들어 쓴다는 네 말을 듣고 이 애비는 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걸까?

"아버지, 눈이 좋아 앞이 잘 보일 때는 두 다리가 있어도 예사로 생각하며 살았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고부터 두 다리가 튼튼하다는 게 그리 기쁠 수가 없어요."

영미야, 네가 오늘 저녁, 이 못난 애비에게 한 이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마. 사랑한다. 영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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