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바래길에서 사부작] (13) 이순신호국길 2편-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 노량마을 7.8 ㎞ 2시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이순신영상관을 둘러보고 나면 본격적으로 바래길 13코스를 걷게 된다. 2016년 6월 말 현재 영상관 주변은 이순신순국공원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2011년부터 총사업비 280억 원을 들여 차면리 관음포 일대 8만 7586㎡를 이순신을 주제로 한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공사는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바래길 초입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순신 어록을 따라 = 이락사와 첨망대가 있는 이락산이 해안으로 길게 뻗어나간 모습을 왼편으로 끼고 해안길을 걷는다. 바래길 이전에 이순신호국길이 이미 만들어진 곳이어서 확실히 이정표가 많다. 그리고 초입부터 이순신 어록을 담은 입간판이 줄을 서 있는데, 이 입간판은 13코스 곳곳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입간판에는 전체 노선도와 현재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이정표 노릇도 하고 있다.

▲ 바래길 13코스 초입 산등성이 밭 사잇길.

가장 먼저 서 있는 입간판에는 어록이 아니라 이순신의 호국정신을 표현하는 구국희생정신(救國犧生精神)이란 말이 적혀 있다. 나라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그의 희생정신을 담은 말이다.

길은 곧 등성이로 접어든다. 능선을 따라 밭들이 누워있다. 그 사이로 반듯하게 하얀 시멘트길이 이어진다. 뒤를 돌아보면 관음포가 한눈에 보인다. 산등성이 밭 너머 바다, 바래길 특유의 풍경은 그대로다. 바다 건너편으로 하동과 순천이 지척이다. 포스코 광양제철소와 하동화력발전소가 있는 곳이다. 한동안은 소쩍새가 울어대는 한적한 산길이다. 중간에 도로를 한 번 만나는데 아마도 이전 19번 국도의 일부인 듯하다. 이 도로를 만나자마자 바래길은 능선을 벗어나 바닷가로 내려간다.

▲ 월곡마을로 향하는 산길 끝 편백 숲.

아무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으슥한 해안이다. 바닷가는 물이 빠져 너른 갯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끄트머리에 살짝 걸친 모래사장을 걸어 건너편 등성이로 간다. 아담한 무논이 있는 산길을 오르면 다시 탁 트인 능선길이다. 바람에 무성한 풀이 한쪽으로 펄럭인다. 제법 깊은 편백 숲을 지나고, 솔숲도 지나면 내리막길. 바래길은 월곡마을로 내려선다. 바닷가 작은 마을이지만 논도 있고, 어선도 제법 많다. 주민들이 근면 성실하기로 소문난 마을이란다.

월곡마을이 끝나고 월곡교를 지나면 시작되는 설천해안도로.

◇두 번째 거북선 = 월곡마을에서 종착지 충렬사까지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월곡마을을 지나고부터는 노량 앞바다, 남해대교를 보며 걷는 길이다. 건너편으로 하동 노량마을이 보인다.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월곡교를 지나면 해안도로는 아스팔트로 바뀐다. 국도 19호선과 연결되는 1024번 지방도다. 설천면의 아름다운 풍광을 끼고 달리는 설천해안도로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차량 통행은 거의 없지만 가끔 지나는 차량은 속도가 높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 도로 걷다 보면 감암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두 번째 거북선을 만난다. 남해군수협 감암위판장이다. 지난 2009년 준공한 이곳은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영락없이 거북선 모양을 하고 있다. 거북선 위판장을 둘러보고 뒤를 돌아섰는데, 길 한편에 한글로 적힌 공적비가 있다. 그동안 바래길을 걸으며 한자로 된 공적비는 여럿 보았지만, 한글로 된 것은 처음이다. 글귀도 운치가 있다. "정덕원의 공적이 이곳에 살아있다." 감암마을을 지나면 제2남해대교 완성된 교량이 압도적인 높이로 우뚝 서 있다. 그리고는 곧 남해대교다. 길은 남해대교 아래를 지나 노량마을로 이어진다.

▲ 거북선처럼 만든 남해수협 감암위판장 건물.

◇이순신이 수호하는 노량마을 = 노량마을은 '충무공의 혼'이 지키는 마을이다. 이런 믿음으로 400년 전부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전설이 절정에 이른 듯하다. 당시 일본인들은 남해 곳곳에 있었지만 노량마을에는 살지 않았다고 한다. 남해섬과 육지를 잇는 중요한 곳이었는데도 그랬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노량에도 순사가 머무르는 주재소가 있었는데, 순사가 오기만 하면 미치거나 병이 들어 곧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일본 형사들은 노량으로 발령나는 것을 꺼렸고 발령이 나도 근무 시간에만 머물렀다고 한다.

충무공 혼의 전설은 충렬사에서 비롯된다. 충렬사는 관음포 앞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이 남해를 떠나기 전 임시로 매장된 곳에 세워졌다. 충무공이 떠난 지 30년 후 1628년 남해 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 자리에 사당을 세워야 한다고 주창했고, 그로부터 다시 5년 후 초가로 된 1칸짜리 사당이 세워진다.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을 충민공(忠愍公)이라 불렀다. 충무공이란 시호는 이로부터 10년 후에나 받게 된다. 충렬사도 이락사처럼 고즈넉하고 아담하다. 충렬사 주변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두려움 탓일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충렬사를 없애기보다 벚나무로 둘러싸 버렸다. 봄이면 충렬사 주변이 일본인들이 심은 벚꽃으로 가득하다. 많은 관광객이 이 벚꽃을 구경하러 노량을 찾는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장면이겠다.

▲ 남해충렬사 사당 뒤편 충무공 이순신 가묘.

충렬사 바로 앞바다에는 바래길 13코스에서 만나는 세 번째 거북선이 있다. 이번에는 진짜 거북선이다. 안내문을 보면 옛 기록을 참고해 1980년 1월 31일 해군 공창에서 복원했고, 원래는 해군사관학교에 전시하던 것이라고 한다. 이후 1999년 12월 31일 이곳으로 옮겨졌다. 관람료 500원을 내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거북선 용머리는 남해대교 교량을 바라보고 있다. 거북선 건너편 노량 앞바다는 이순신이 떠난 지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거칠게 살아 흐르고 있다.

▲ 충렬사 앞바다에 있는 복원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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