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20부

7월 6일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카리온 16km

모처럼 깊은 잠을 잤습니다. 거기다 늦잠도 잤지요. 늘 새벽 2, 3시면 잠에서 깨곤 했는데 오늘은 6시까지 잔 거예요. 알베르게에 사람도 별로 없고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사람도 없고 하도 조용한 마을이다 보니 이런 기분 좋은 일도 있네요. 그리고 모처럼 환할 때 출발을 하게 되었어요. 오늘은 짧은 거리를 걷기 때문에 마음에 부담도 없네요.

오른쪽 길을 선택해서 가라고 안내서에 나와 있어서 저도 오른쪽으로 걷기로 했습니다. 차도를 피해서 가는 길이라서 아는 사람은 이 길로 가는데 10㎞ 정도 가니 다시 길은 만나지고 카리온까지 찻길을 끼고 지루한 메세타가 이어지는데 메세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 찻길을 끼고 있으니 화장실 해결하기도 어렵고 직선으로 이어져 있어 더욱 지루한 느낌이었어요.

길가 바르(bar)에서 만난 이탈리아 아저씨 3인방.

커피를 먹고 가려고 바르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이탈리아 3인방을 만났어요. 매우 반가웠지요. 사진도 찍고 그제야 이름도 주고받았어요. 메모지를 달라고 하더니 이름을 다 적어주고 자기들은 시칠리아에서 살고 있고 어디쯤 산다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세히 알려주더라고요. 오라치오, 닌니, 로코였어요. 귀여운 중년 아저씨들입니다.

그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그곳 바르에 계속 앉아 한국에 있는 남편, 친구, 이웃들에게 전화도 하며 저의 소식도 전하고 느긋하게 다시 일어나 걸었어요.

오늘은 걷는 길이 짧아서인지 늦게 출발을 했는데도 11시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는 알베르게가 많아요. 내일 걸을 17.5㎞는 무인구간이라고 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쉬어 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제가 묵으려는 알베르게가 문을 열려면 한 시간이나 남아서 알베르게 앞에 배낭으로 줄을 세워 놓고 바르로 갔습니다. 거기에선 켈리 모녀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버스터미널 겸 바르였거든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또다시 만나니 아주 반가웠어요. 이젠 이들과 스스럼없이 껴안고 반가움을 나눕니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거리.

모녀 둘 다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이곳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이틀 머물다 레온(Leon)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올 때도 버스를 타고 온 듯해요. 알베르게 문 열 시간이 되어 작별을 하고 알베르게로 갔습니다. 이곳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인데 봉사자인 호스피탈레로들도, 수녀님들도 아주 친절했습니다. 수박을 잘라 놓고 도착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고 표정들도 아주 밝았어요.

카리온에 있는 성당.

한국인 두 청년과 함께 부른 아리랑

먼저 슈퍼에 가서 장을 봐다가 점심 요기를 했어요. 며칠 전에 만났던 태훈이도 이곳에 함께 머무르게 되었네요. 태훈이랑 같이 다녔다는 한국 누나 3명도요. 와~ 프랭크 부자도 같은 곳이네요. 아는 얼굴들이 많으니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한국인 청년 한 명이 곤란한 얼굴로 앉아 있었어요. 캐나다 교포 선근이인데 어찌하다 보니 돈이 다 떨어져서 가족이 돈을 보내주길 기다리며 이틀째 수녀원에서 묵고 있대요. 제가 5유로를 주며 일단 요기나 하라고 했더니 안 받으려고 손사래를 치다가 정말 괜찮다고 했더니 고맙게 받더군요. 잠깐 없어졌던 태훈이는 음식을 한가득 사서 들어왔습니다. 알고 보니 이 알베르게는 각자 서로 준비해온 음식으로 저녁상을 차리는 게 전통이랍니다. 그걸 알고 태훈이는 선근이 몫까지 음식을 많이 사서 온 것이죠. 너무 기특했습니다. 저도 다시 슈퍼에 가서 음식을 사 왔고 모처럼 한국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카리온의 알베르게. 귀여운 수녀님이 기타를 치고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인사를 나눴다.

6시부터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었어요. 귀여운 수녀님이 기타를 치며 모두 함께 노래를 하는 흥겨운 시간이었어요. 아는 노래는 몇 안 되었지만요. 그런데 누구든 나와서 노래를 하라고 하니까 선근이가 젤 먼저 손을 들고 나가더군요.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엥~!! 찬송가를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녀님께서 아리랑을 부르라고 추천을 해 주시더라고요. 아마 그동안 많은 한국인이 아리랑을 불렀던 모양이에요. 노래를 마치니 많은 사람이 엄지를 들어주며 좋아해주더라고요. 끝나고 나서 이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데 정신을 팔려 그만 미사에 늦고 말았어요. 모처럼 저의 말문이 트여 정신이 없었나 봐요. 성당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니 다행히 아직 미사가 끝나지는 않았어요. 신부님의 축복도 받고 수녀님들께서 직접 만드신 행운의 별도 받았지요. 이 별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곳에 있어도 별이 빛을 밝혀줘 길을 잃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리고 음식을 나누는 시간, 기본적으로 수녀원에서 수프를 끓여주셨고 각자 준비한 음식으로 봉사자들과 저녁을 차렸는데 정말 근사한 식탁이 차려졌어요. 그리고 영어를 잘하는 태훈이와 선근이 덕분에 프랭크와 그동안 안면 있던 사람들과 조금은 소통을 하는 시간도 되었지요. 수녀님들도 다시 기타를 들고 나오셔서 분위기를 띄워 주셨어요.

문을 열기 전인 알베르게 앞에 줄을 선 순례자들 배낭.

그런데 태훈이가 시간이 많이 없어 내일 레온으로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하더라고요. 태훈이, 선근이와 함께 나와서 버스 타는 곳도 알려주고 맥주도 한잔 사 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10시 맞추어 알베르게로 돌아왔습니다. 내일 이 친구들은 늦잠을 잘 것이고 이젠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작별인사도 나누었어요. 아쉬웠지만 이곳에선 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니 어쩔 수 없지요.

아참~! 아까 시몬(순례길 초반에 만난 캐나다 여성)을 오랜만에 만났어요. 수녀님께서 누구의 발을 치료해 주고 있어서 보니 시몬이었어요.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 된 거예요. 시몬의 발은 물집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치료 중인 시몬은 엉엉 울고 있었어요. 너무 안타까워 위로해주었고 눈물을 닦게 화장지도 갖다주었어요. 그리곤 그 후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완주하고 돌아갔겠죠? /글·사진 박미희

카리온의 알베르게에서 즐거운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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