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느긋하게 퇴근을 준비하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퇴근 때 가져가려고 문 입구에 챙겨둔 책, 독서 수업에 사용하기 위해 주문해서 받아둔 책 한 상자가 송두리째 없어져 버렸다. 방금 그 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도 대지 않은 신간 30여 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서관에 온 꼬마 아이가 책 상자를 밟고 올라가길래, 책은 읽는 것이지 사다리가 아니라고 방금 말해 주고 돌아섰는데 그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아마도 방학 동안 시행할 다문화 체험교육 특강에 대해 의논하는 사이 누군가 들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요즘 세상에도 책 훔쳐가는 사람이 있나?'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거리다 유사한 사건이 떠올랐다.

이주민센터에서 우편물 한 상자가 통째 사라진 일이 있었다. 양이 많아서 우체국으로 들고 가지 못하고 찾아오는 서비스를 기다리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딱 짚이는 것이 폐지 수거하는 사람들이 들고 갔으리라는 추측이었다. 결국, 온 동네를 다 뒤지고 CCTV까지 샅샅이 뒤져 찾아낸 사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에어컨 사건도 있었다. 재작년 여름 멀쩡하던 에어컨이 작동이 안 돼서 수리 기사를 불렀더니 뜻밖에 누군가가 실외기 연결 호스를 떼어가서 고장이 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경찰에 의뢰해서 범인을 잡고 보니 역시 고철 수집하는 동네 할아버지셨다. 우리는 그 에어컨을 수리하는데 80여만 원을 들였지만 그 할아버지는 고작 8000원을 고물상에서 받았다고 했다.

이전의 경험을 살려 먼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도서관 앞에 있는 CCTV가 설치된 가게를 찾아가 예상 시간의 녹화 분을 살폈더니 아니나 다를까 상자를 들고 나가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 있었다. 가끔 도서관에 와서 폐지를 거둬 가는 분이었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책 상자를 폐지 상자로 착각하고 들고 나간 모양이었다. 문제는 밖에 세찬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책이 얌전히 내게로 돌아오면 처벌을 논할 사항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이 책이 젖어버려서 원상회복이 어렵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 책값이 적어도 30만 원은 될텐데 폐지 값은 만 원이나 될지 의문이었다. 몇 차례 파출소에서 전화가 오고 또 사건을 맡은 담당 형사 분이 내 차의 블랙박스까지 확인하는 소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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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생각과 작은 욕심들이 타인에겐 어떤 손해를 끼칠지 생각해 봤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는 계속 내려서 나의 마음도 물을 잔뜩 머금은 책처럼 무거워져 가기만 한다. 이 비 내리는 밤에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다>는 제목의 이기호의 책은 어디에서 비를 맞고 있는 것일까? 나는 비 맞고 있을 책 걱정에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윤은주(수필가·창원다문화어린이도서관 운영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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