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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반한 백제 후기 200년 그 시간을 더듬다

[발길 따라 내 맘대로 여행] (83) 충남 공주·부여 -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따라

최규정 기자 gjchoi@idomin.com 2016년 07월 01일 금요일

지난해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소식이 날아왔다. 대상 지역은 공주 공산성의 왕궁지, 왕궁부속시설지, 백제 토성과 송산리 고분군 무덤양식과 국립공주박물관,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 대부분 백제 후기 문화유산이다. 700년 백제 역사에서 마지막 200년도 채 못 되는 시간이 백제를 대표하게 된 이유는 뭘까?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역사도 그 이유이겠지만 당시의 백제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꽃을 피워낸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 가운데 백제의 후반기 도읍이었던 지금의 공주와 부여로 향했다.

공산성(충남 공주시 웅진로 280) 입구에 도착했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를 지킨 왕성이다. 금강을 옆에 두고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쌓아 천혜의 요새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 공주산성,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공산성

공산성 시작은 금서루이다. 금서루는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있는 문루이다.

공산성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맞이하는 것은 금서루 비석들이다.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체민천교용세비 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비인데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금서루는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 등의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와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해 1993년에 복원했다.

정림사지 석불좌상.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 있다.

공산성에서 눈에 띄는 것은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이다. 송산리 고분군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단다.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가 각 방향에서 기운차게 펄럭인다. 성 안에 들어왔다면 여러 갈래 길 중 하나를 택해 천천히 그 세월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자 의자왕은 이곳 웅진성으로 몸을 피하고 다시 일어날 때를 준비했다. 웅진성은 천혜의 요새이고 예식진 장군 같은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진 5일 만에 당나라에 항복한다. 예식진의 배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당으로 건너간 예식진은 높은 벼슬을 받았고 의자왕은 당나라에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국을 그리며 죽은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단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곳 공산성에서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되며 백제의 마지막에 대한 해석이 뒤바뀌고 있다. 2011년 10월에 '정관 19'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백제시대 옻칠 갑옷이 이곳에서 발견됐다.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의 것임을 말해주는 전쟁 유물은 이곳에서 최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정림사지 5층 석탑

한스러운 백제 마지막 역사의 진실을 따라 계속 걷는다. 1시간 남짓이면 공산성 외곽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입장권 어른 12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600원)

유적이 주는 경건함은 그 오랜 세월을 견디며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에 자리한 정림사지는 저절로 숙연함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정림사는 백제시대에 있었던 절터로 백제가 이곳에 도읍을 옮기면서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세운 절이다. 지금은 절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고 그 가운데 정림사지 5층 석탑만이 위용을 드러내며 당당히 서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15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흔적이다. 절은 사라졌지만 석탑은 당시의 상황을 온몸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1층 몸체 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공적으로 새겨 넣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소정방이 세운 '평제탑'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발굴조사 후 고려시대 유물인 기와에서 '정림사'라는 글귀가 발견됐다. 이후 연구 등을 통해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으로 확인되면서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됐다고 한다.

아쉽다면 절터 바로 옆에 자리한 정림사지 박물관에 들어가 보자. 과거에 정림사 건물의 배치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당시 백제인의 삶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정림사 뒤편으로 석불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 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 절을 다시 세울 때 이 강당자리에 금당을 세우면서 이 불상을 주존불로 모셨다고 한다.

굴곡의 역사 속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 정림사지 5층석탑을 직접 본 것만으로 긴 여운이 남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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