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만나다]조민규 애솔배움터 교장

"경남도민일보에서는 저를 보수꼴통이라 보던데 그렇지 않다." 그는 이 말을 먼저 꺼내며 웃음을 지었다. 조민규(81) 씨는 합포문화동인회를 이끌어온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 절반은 야간학교 애솔배움터와 함께였다. 아직도 그가 애솔배움터를 운영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지난 15일 롯데백화점 마산점(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애솔배움터 교장으로 보람있는 노후를 보내는 그를 만났다.

야간학교와 35년 인연

-야간학교 애솔배움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35년 전에 제가 야간학교 선생을 했다. 적십자사에 있을 때 (마산)월영마을에 36육군병원이 있었다. 그 병원 안에 어려운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야간학교가 있었다. 청소년들(35명가량)이 저녁을 못 먹고 직장에서 바로 오기 때문에 라면을 끓여줬다. 선생님들은 대학 다니다가 군대 온 사람들이었다. 제가 급식 때문에 자주 가니까 선생님들이 저에게 매주 한 시간 수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46살 때였다. 당시 검정고시에 도덕 시험과목이 있어서 도덕을 가르쳤다."

-애솔배움터 교장은 언제부터 했나.

"군 사령부에서 부대 안에 있는 모든 학교를 철거하래서 학생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됐다. 군인 선생들이 시청을 방문해 야간학교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잘 안 됐다. 그래서 1986년에 적십자사 경남지사에서 '애솔(작은소나무)배움터'란 이름으로 야간학교(교장·설립자 조민규) 설립식을 하고 10개월간 강당에서 운영하다가, 마산 가톨릭여성회관으로 옮겨 애솔배움터 후원회를 만들었다. (천주교 마산교구)박정일 주교 계실 때 승인 받은 걸로 알고 있다."

▲ 조민규 애솔배움터 교장./김구연 기자

-그 뒤에 또 옮겼나.

"야간학교를 운영하려면 라면을 끓여먹어야 하니까 반드시 조리대와 가스통 놓는 곳이 있어야 했다. 당시 한백건설 강종열 회장이 배려해줘서 옛 한백빌딩(현재 경남도민일보 빌딩)에서 야간학교를 1년 정도 했다. 또 산복도로에 외국 수녀들이 하는 유아원, 마산 산호동 옛 여성회관, 무학여고 앞 빌딩으로 옮겨다녔다. 최근엔 마산공설운동장 안에 5년간 있었다."

-야간학교 운영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저 혼자서 다했다. 1996년 합포문화동인회가 법인으로 되고서야 후원사업으로 매달 야간학교 운영비를 지원해준다. 마산 야구장 쪽으로 갔을 때 집세가 너무 비쌌다. 한 2년 하다가 시에 찾아가 '야간학교를 내가 운영해왔는데, 시가 문맹자 교육을 해야 되지 않나' 사정했다. 이후에 시에서 집세만큼 우리한테 주면 그걸 공설운동장 야간학교에 주는 형식으로 운영했다. 올해부턴 경남은행 산호동지점 3층에 있다. 손교덕 경남은행장이 고맙게도 그 공간을 쓰도록 해줬다. 냉난방도 되고 책걸상도 새로 넣고 학교 교실보다 더 좋게 만들어줬다."

-지금 학생들은 청소년이 아닌가.

"한글 모르는 아주머니들이다. 10년 전 쯤부터 바뀌었다. 그동안 공부했던 청소년들이 성장해서 나갔고 문맹자들이 혼재하다가 지금은 야간 한글학교가 됐다."

-선생님들은 자원봉사인가.

"10원도 안 준다. 대학생 25명이 월~금요일 저녁에 수업을 한다. 한글1반, 한글2반, 초등반(한글도 알고 영어도 배우고), 중등반, 검시반이 별도로 있다. 학생은 50대 후반~60대가 대부분이다. 정규 학교처럼 소풍 가고 가을 체육대회도 하고 송년 잔치도 한다."

-힘들 때와 보람될 때는 언제인가.

"사실은 힘들다. (제가)부유한 사람도 아니니까 몇 번 문 닫을 생각도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야간학교 다닌 학생한테 엽서를 받았다. '지금은 마산시내의 많은 간판들을 다 읽습니다. 그리고 책방에 가서 자유롭게 책을 사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 엽서 때문에 문을 못 닫았다. 야간학교 다니면서 검정고시 쳐서 대학 졸업한 사람도 많다. 은행에 가면 도장과 통장 갖고 가서 만원만 찾아달라고 직원한테 부탁했었는데, 이젠 당당하게 돈 찾을 수 있다고 말할 때 제일 기쁘다."

-합포문화동인회 민족문화강좌는 어떻게 시작했나.

"창신학교를 졸업했던 윤병섭(전 진해교육장·마산상업중학교 선생) 씨 등 원로분들과 잘 알고 지냈다. 저도 창신학교 나왔으니까. 1970년에 우연히 노산(이은상) 선생 오면 같이 만나곤 하면서 친해졌다. 노산 선생이 서울서 민족문화강좌(민족문화협회 주최)와 음악회를 매년 하고 있었다. 1976년 12월에 노산 선생이 '마산이 많이 발전하고 있는데 바탕이 없고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역문화가 사라질 수도 있다. 마산서도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다. 고민하다가 1977년 첫 강좌를 노산 선생 모시고 했다. 민족문화협회 마산지부 주최로."

-'노산의 양아들'이란 소문이 있더라.

"그건 아니다. 노산 선생도 그런(양아들) 얘기를 한 적이 없고 저도 그런 염치가 없다. 울아버지 있는데 아버지라고 할 필요도 없고, 노산 선생도 따로 아들이 있다. 난 외동이다. 아무리 가까이 지내도 형님 소리도 잘 안 한다. 유일하게 형님 하는 분은 두 분(이순항 전 경남도민일보 사장, 최명해 전 신흥여객 사장)이다. 이 강좌도 소박만 마음으로 해본 거다. 당시 유명한 Y논단이라고 있었다. 그것처럼 해보자고 시작한 거다."

합포문화동인회 민족문화강좌 내년 40주년

-현재 합포문화동인회 강좌는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

"1996년 11월 적십자사 사무국장 퇴임 때 강좌 들으러 왔던 분들이 '저 사람 퇴직하면 강좌 어렵지 않겠나'해서 법인을 만들었다. 김조일 전 한국철강 전무, 강재현 변호사, 최충경 창원상의 회장, 강동수 제일감정 대표, 강종열 회장(새롬건설), 김원태 회계사 등 30여 명이. 법인으로 만든 이유도 제가 특정인 도움을 안 받았고, 기업이나 관청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전 20년 동안 제가 운영했고, 법인 이후엔 그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사장은 김조일 씨다. 저는 현재 평회원이다."

-강사 섭외는 어떻게 하나.

"제가 한다. 서울서 도와주는 교수님들 계신다. 지방에서 십시일반 모아 40여 년 간 계속해서 강좌를 하는 건 드물다고 서울서 다 놀란다. 매월 셋째주 금요일 오전 7시로 강좌 시간이 정해져 있다. 예전엔 강사 명단 보고 국가정보원이나 경찰들한테 욕 많이 먹기도 했다."

마산에 대한 걱정과 기대

-아직 이은상 이념 갈등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은상이샘 철거 문제도 계속 논쟁 중이다. 은상이샘과 3·15기념공원이 똑같이 보존되는 건 어찌 생각하나.

"두 개 다 잘 보존했으면 좋겠다. 우물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동네사람이 같이 먹었던 것이라고 들었다. 지난달 강좌에 초청됐던 김명석 교수와 3·15국립묘원 들렀다가 김주열 표지석도 보러갔더니 표지석만 덩그러니 있고 주차된 차들 때문에 벽화도 못보게 돼있고, 굴다리 안에도 그림이 있던데 못 들어가게 걸어놨더라. 표지석 네 귀퉁이에 말뚝이라도 박고 사각형으로 줄을 둘러서 표시해줬으면 좋겠다. 방치된 느낌이었다. 그런 걸 창원시가 해주면 좋겠다."

-마산해양신도시 추진 중인데 마산 사람으로서 견해는.

"기왕 매립해서 개발하게 됐으니 살기좋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마산에 많이 살러 오면 좋겠다. 그런데 부영에서 한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창원시정발전연구원에 간 적 있다. '아파트만 짓는 부영이 저기에 뭘 넣는단 말이냐. 자문 잘 받아서 하면 좋겠다. 안상수 시장한테 명품 중 명품을 만들 기회를 준 거다. 마산 자랑거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자랑거리 축에 들어가도록 하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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