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수배자와 담당 경찰 신분으로 만나…학생 배려해주고 구속 막아, 퇴직 앞두고 '감사패'

"술 한 잔 하려면 짧은 거리인데도 택시를 두세 번씩 갈아타면서 사람들 눈을 피해야 했죠."

김성진(53) 씨는 30년 전 정용식(61) 경감을 만나러 가는 길을 이렇게 기억했다. 두 사람이 007작전을 방불케 만난 것은 수배자와 경찰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1985년 경남대학교 제17대 총학생회 회장이던 성진 씨는 정권 타도와 민주화 쟁취를 외치며 학생 운동을 주도했다. 경남대 총학생회가 부활해 민주화 열기가 한창 끓어오르던 때라 학생 운동은 여느 때보다 거셌다.

학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경찰과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이때 성진 씨 전담 경찰이 정용식 마산중부경찰서 경감이었다.

성진 씨는 "형님은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피해가 덜 갈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배려해준 사람이었습니다"고 전했다.

정 경감은 수배 중인 성진 씨를 만나고자 동료 경찰을 따돌리기도 했다. 그는 성진 씨를 만나 학교 소식을 전해주고 고민을 들어주면서 두 사람은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다.

세월이 흘러 '라코스테 맨'으로 불리던 젊은 경찰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요리조리 도망 다니며 속을 썩이던 대학생들은 맡은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지난 24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한 식당에서 경남대학교 제17대 총학생회 집행부가 뭉쳤다. 정 경감 퇴임식을 앞두고 함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다.

총학생회.jpg
▲ 1985년 경남대학교 제17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성진 씨 등 1980년대 학생회 간부들이 6월 30일 정년퇴임하는 마산중부경찰서 정용식 경감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 김구연 기자

지난 모임 때 퇴임 소식을 듣고 한마음으로 만든 자리다. 오는 30일 퇴임식에는 감사패와 함께 선물도 전달할 예정이다. 이날 경남대학교 출신 외에도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진주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자란 정용식 경감은 1978년 5월 27일 전투경찰대 기간요원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농업경영 분야를 전공하고자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정 경감은 6·25 참전용사였던 아버지의 후유증과 잇단 사업 실패로 가게가 기울자 전투경찰대에 자원입대했다.

정 경감은 제대하면서 응시한 경찰 시험에 합격해 경찰이 됐다. 1984년 3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정보과 학원 담당으로 20년간 지내며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이 '이해'였다.

그는 학생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를 알고자 당시 학생들이 읽던 사회과학 서적도 독파했다. 때로는 어설프게 주장을 내세우는 학생들에게 '공부 좀 하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무조건 '안 된다'고만 말하는 어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정 경감은 "경찰로서 학생들 부모님을 찾아가 말려 달라는 부탁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그들을 이해했고 공감대가 있으니까 학생들이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주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던 겁니다"고 전했다.

감사패.jpg
▲ 감사패. / 김구연 기자

학생들을 검거하고 싶은 유혹도 많았다고 했다. 특히 김성진 씨처럼 시위를 주동한 수배자를 검거하면 1계급 특진 기회도 줬다. 상당히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정 경감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매일같이 만나 부대끼는 동생들인데 제 이익 때문에 학생들을 잡을 수 없지요. 학원 담당으로 20년 생활하면서 내 손으로 직접 운동권 학생을 구속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고 말했다.

학생들로부터 감사패 받는 소감을 묻자 그는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다'고 했다. 정 경감은 "매일 시위를 하니까 학생들도 저도 참 많이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지금 경찰이 민생치안에 전념할 수 있고 안전하고 조용한 시절을 맞이하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 한 몸 아끼지 않고 민주화를 외쳤던 학생들이 대견하고 지금도 각자 자리에서 일하는 것 보면 뿌듯합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그에게 특별한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별 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40년 가까이 경찰 노릇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과 추억을 만들고 싶습니다"고 답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